[팀장 칼럼] 한 달 만에 체포된 FTX 창업자, 반년 넘게 활개치는 권도형
나 엄연한 경제 사범이야. 왜 강력계에서 나서고 난리야?
지난 2009년 개봉한 영화 ‘작전’에서 주가 조작을 통해 거액을 벌어들이다 체포된 황종구(배우 박희순 分)가 형사에게 내뱉은 말이다. 강력 범죄자들과 다르게 대우해 달라는 것이다. 이후 그가 살해한 동료 주가 조작범의 시신이 발견돼 형사에게 “납치·살인도 경제 활동이냐”는 조롱을 받은 채 끌려가긴 하지만 말이다.
자신이 경제 사범임을 강조하며 특별 대우를 요구하는 극 중 황종구 대사는 경제 범죄자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대하고, 때로는 고학력자·엘리트로 취급받기까지 하는 국내 현실을 보여준다. 올해 가상자산 시장에서 대규모 투자 피해를 낳은 ‘FTX 파산 사태’와 ‘테라·루나 사태’를 일으킨 주모자들에 대한 미국과 한국 사법 당국의 대응 방식 차이를 보면 비슷한 현실 인식이 엿보인다.
세계 3대 가상자산 거래소였던 FTX는 지난달 갑작스런 유동성 위기를 겪다 며칠 만에 파산을 신청했다. 창업자인 샘 뱅크먼-프리드는 지난 2019년부터 FTX에 예치된 투자자들의 자금을 계열사인 알라메다 리서치로 빼돌려 알라메다의 부채 상환과 부동산 구입, 정치인 후원 등에 쓴 것으로 밝혀졌다.
3년여간 지속된 자전거래와 고객 자금 유용 등 뱅크먼-프리드의 범죄 행각은 올 들어 가상화폐 가격이 크게 하락해 FTX의 유동성 위기가 불거지고 나서야 드러났다. FTX가 무너지면서 수백만 명의 가상화폐 투자자들이 피해를 봤다. 피해자 중에는 싱가포르 국부펀드인 테마섹, 일본의 손정의 대표가 이끄는 소프트뱅크 등 세계적인 기관투자자들도 포함돼 있었다.
투자자들에게 천문학적인 피해를 입힌 뱅크먼-프리드를 단죄하려는 미국 사법·금융 당국의 칼은 빠르고 매서웠다. 미국 정부는 FTX 본사가 있는 바하마에 뱅크먼-프리드에 대한 체포를 요청했고, 바하마 경찰은 지난 12일 그를 붙잡아 곧 미국에 신병을 인도하기로 했다.
미국 검찰은 그를 사기와 돈세탁, 불법 정치자금 공여 등 8개 혐의로 기소했다. 법원이 혐의를 모두 인정할 경우 뱅크먼-프리드는 사실상 종신형과 다름없는 최대 115년의 징역형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검찰 움직임과는 별도로 미 증권거래위원회(SEC)와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등도 그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할 예정이다. 뱅크먼-프리드는 징역형과 함께 거액의 손해 배상까지 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미국 정부 요청에 의한 해외 은신처에서의 체포와 형량 전망, 금융 당국의 민사소송 제기 방침 발표까지 걸린 시간은 FTX 파산 사태가 발생한 후 불과 한 달 만에 이뤄졌다.
앞서 지난 5월 국내에서는 테라·루나 사태로 4조원 이상의 투자자 피해가 발생했다. 테라와 루나는 이른바 ‘스테이블 코인’으로 가치가 미국 달러화에 연동해 안정성이 높다는 소문이 돌며 한때 가상자산 시가총액 10위권 안에 들어가기도 했던 가상화폐다. 그러나 이 코인들은 한순간에 대규모 매도가 연이어 발생하고 -99.99%라는 기상천외한 하락률을 기록하며 휴짓조각이 됐다.
그럼에도 이 코인의 발행사인 테라폼랩스 설립자 권도형 대표는 아직도 법망을 피한 채 해외에서 체류 중이다. 테라·루나가 흔들리기 시작하던 4월말 싱가포르로 출국한 후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를 거쳐 최근 세르비아에 체류 중인 것으로 확인됐을 뿐이다. 검찰은 테라·루나 사태가 발생하고 나서 반년이 넘도록 체포는커녕 그의 행적을 확인하기에 급급한 상황이다.
권 대표와 함께 테라폼랩스를 창업해 테라·루나 사태에 직접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신현성 대표에 대한 법원의 판단은 이 사태로 손실을 본 피해자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 검찰은 신 대표에 대해 자본시장법 위반 등의 혐의를 적용해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지난 3일 법원은 “증거를 인멸하거나 도주할 우려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기각했다. 비슷한 혐의를 받는 테라의 초기 투자자 3명과 개발자 4명 역시 구속을 면했다.
실제로 최근 만난 가상자산 업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현행 국내법에는 가상자산을 다루는 내용이 거의 없다”며 “수사 대상에는 올라도 절대로 구속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경제 사범을 강력 범죄자와 다름 없이 심각한 중대 범죄를 저지른 자로 규정하고 중벌로 다스리는 미국이었다면 이들이 반년이 넘도록 유유자적한 도피를 이어가고 제 집에서 변함없이 호의호식을 누릴 수 있었을까.
물론 미국과 같은 강력한 처벌이 경제 범죄를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미국에서는 2008년 금융위기 후 거대한 ‘폰지 사기’의 주범이었던 버나드 메이도프에게 징역 150년형을 내렸고, 결국 그는 지난해 감옥에서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뱅크먼-프리드의 FTX와 같은 또 다른 경제 범죄와 사기는 계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파렴치한 방법으로 수많은 사람에게 금전 피해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긴 자들에게 최소한 강력 범죄자들과 같은 수준의 무거운 처벌과 사회적 사망 선고로 내려 단죄해야 한다. 특히 아직 제대로 된 법조차 마련돼 있지 않은 가상자산 시장에서는 사법 당국의 인식 변화와 강한 처벌이 없다면 여러 신종 사기가 더욱 기승을 부릴 터다.
법원은 수조원에 이르는 천문학적 손실을 야기하고 투자자 여럿이 스스로 목숨을 버릴 정도의 중대 범죄를 저지른 자에게 단지 증거 인멸의 우려가 없다며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를 보고 지금 이 순간에도 인생 역전을 꿈꾸며 제2의 권도형이 되고자 하는 예비 경제 범죄자들이 새로운 ‘작전’을 짜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진상훈 금융2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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