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공룡 발자국 천국...40년간 고생물학 지평 넓혔다
우리나라 발자국 화석의 40년 역사
1982년 양승영 경북대 교수가 경남 고성군 덕명리 해안가의 진동층에서 한국 최초로 공룡 발자국을 발견했습니다. 그로부터 40년간 우리나라에선 공룡을 비롯해 중생대 백악기에 살았던 생물들의 다양한 발자국 화석이 발견되면서 세계 최초로 밝혀낸 비밀이 상당한 수준입니다.
● 살아 움직인 흔적이 생생! 발자국 화석
“뼈 화석은 ‘동물이 어떻게, 왜 죽었을까’라는 질문에 답을 찾는 과정이라면, 발자국 화석은 동물이 ‘살아서 움직였던 행동’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지난 11월 10일 공룡 발자국 발견 40주년을 맞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국립문화재연구원 기자간담회가 열렸습니다. 이날 공룡 발자국 화석 분야 세계 권위자인 마틴 로클리 미국 콜로라도대 교수는 발자국 화석과 뼈 화석 연구의 차이를 묻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습니다. 뼈 화석 등 다른 자연유산에 비해 아직은 주목을 덜 받았지만, 사실 발자국 화석은 과거에 살았던 생물의 비밀을 캘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단서라는 것입니다.
로클리 교수는 “공룡에 대한 학술적, 대중적 관심이 높았던 데 반해, 예전에는 공룡이 몸집이 크고 느린 엉성한 동물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며 “하지만 발자국 화석을 통해 공룡이 (우사인 볼트처럼) 빠르게 움직이기도 한다는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런 연구를 바탕으로 빠르고 활기차게 움직이는 새로운 공룡의 모습을 그린 ‘공룡 르네상스’가 1980년대에 열릴 수 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로클리 교수는 1987년부터 꾸준히 한국을 찾아 발자국 화석을 발견하고 연구했습니다. 그는 이날 강연에서 주목할 만한 발자국 화석들을 소개했어요. 그 중 두 발 보행 악어의 결정적 증거가 된 발자국 화석 ‘바트라초푸스 그란디스’를 가장 기억에 남는 화석으로 꼽았습니다.
로클리 교수는 “2억 년 전 트라이아스기에 살았던 악어의 뼈가 미국에서 발견됐을 때, 앞다리가 매우 짧아 학자들은 이 동물이 뒷다리로 걸었을 거라는 추측을 했다”며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증거가 없었는데, 한국에서 발견된 발자국 화석으로 그 퍼즐이 맞춰졌다”고 당시의 감동을 전했습니다.
고생물학자가 발자국 화석을 분석하는 일은 마치 과학수사대가 범죄 현장에서 증거를 찾는 것과 비슷해합니다. 단서를 통해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 발자국 주인이 누구인지, 어떤 행동을 했는지 탐색하기 때문입니다.
발자국에서 단서를 찾아라! 발자국 분석법
● 발자국 화석, 어떻게 분석할까?
고생물학자는 어떻게 화석에서 생물의 정보를 알아낼까요. 임종덕 국립문화재연구원 박사는 “현장에 도착하면 한 마리가 걸어간 길인 ‘보행렬’을 가장 먼저 찾는다”며 “보행렬이 없으면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매우 한정적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보행렬을 발견한 후엔 좌우 발자국을 찾아 발자국별로 번호를 매기고, 걸어간 방향을 알 수 있도록 방위를 표시합니다. 이후 발자국의 모양대로 발자국 지도를 그리고, 3D 디지털 데이터로 정밀 기록도 남깁니다. 그러면 자연적인 풍화나 침식으로 화석이 사라지더라도 원형을 그대로 복원할 수 있게 됩니다.
보행렬에서 발자국 화석의 ‘모양’은 발자국의 주인을 찾는 단서입니다. 공룡인지 개구리인지, 공룡이라면 두 발로 걷는 육식공룡 수각류인지 네 발로 걷는 초식 공룡 용각류인지 등 생물의 종류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발자국의 ‘길이’를 알면, 발끝부터 골반까지의 높이를 추론할 수 있습니다. 양쪽 발 사이의 거리인 ‘보폭’을 알면 보행 속도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때 발자국의 길이를 이용해 골반의 높이를 구하는 알렉산더 공식과, 보폭과 골반 높이로 이동 속도를 구하는 툴번의 공식 등을 사용합니다.
초식 공룡은 발톱이 말발굽처럼 뭉툭하지만 육식 공룡은 발톱이 뾰족하고 사나워 발자국 화석을 보면 발자국 주인이 어떤 종류의 공룡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임종덕 박사는 “경북 의성에서 아기 공룡 2마리가 아장아장 걸어간 발자국 화석이 발견됐는데, 이는 세계적으로 아주 특이한 경우였다”며 “보통은 무게가 많이 나가야 발자국이 잘 찍혀서 큰 공룡의 발자국이 많은데, 작고 가벼운 아기 공룡의 발자국도 남았다면 미세 점토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이는 당시의 퇴적 환경과 해당 종이 서식했던 서식지 환경도 발자국 화석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또 “이렇게 분석된 발자국이 기존에 발견된 발자국인지, 새롭다면 비슷하고 다른 점은 무엇인지 모두 다 디테일하게 분석해 ‘신종’으로 등록한다”고 밝혔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했던 지구의 역사를 최초로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은 고생물학자의 큰 기쁨일 것입니다.
Q&A 한국은 공룡이 뛰놀던 낙원! 유네스코 등재될까
학자들은 ‘한국에 이렇게 뛰어난 발자국 화석 산지가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할 정도로 입을 모아 칭찬합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남해안 일대는 발자국 화석 산지로 유네스코 자연유산 잠정목록에도 올라있습니다.
Q. 우리나라 공룡 발자국 화석 산지가 유네스코 잠정목록에 올라 있다고요?
임종덕 "남해안 일대 공룡화석지는 ‘KCDC(한국의 백악기 공룡 해안)’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자연유산 잠정목록에 올라 있어요.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신종 발자국 화석이 다수 발견되는 유일무이한 발자국 화석 산지이기 때문에 정식 등재도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생각해요. 현재 경남 고성, 전남 해남, 여수, 화순, 보성 이렇게 5개의 지역이 볼리비아, 스페인-포르투갈 등의 나라와 유네스코 자연유산 등재를 놓고 경쟁 중이에요. 최근 연구 결과를 토대로 기존에 올렸던 발자국 화석 산지에서 진주 지역 등 일부를 추가하거나 수정해 차근차근 준비하려 합니다."
Q. 영국인이 35년간 꾸준히 한국 화석 산지를 방문한다는 사실이 놀라워요.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로클리 교수 "한국은 공룡뿐 아니라 개구리, 물고기, 도마뱀 등 정말 다양한 척추동물들의 발자국 화석을 만날 수 있어요. 발자국 화석이 있는 한국의 퇴적층은 모두 과거에 호수가 있던 곳인데, 호수는 백악기에 살던 동물이 모이는 장소라 생물 다양성도 아주 높아요. 발자국 화석이 풍부하게 발견되는 세계 유명 화석 산지에서도 대부분 생물의 종류가 최대 6~8개 발견되는데, 한국은 진주, 함안 등지에서 12~16가지가 발견돼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다양성을 갖죠. 또 같은 장소에서 올 때마다 새로운 화석을 발견하기 때문에 계속 한국을 찾게 됩니다."
Q. 발자국 화석이 선명히 남아 있는 이유가 뭘까요?
임종덕 "우리나라 발자국 화석은 화산 폭발 등으로 열 변성 작용 때문에 지층이 단단하게 구워져서 보존상태가 좋아요. 도자기를 굽는 것과 비슷하죠. 호숫가를 거닐던 공룡들이 발자국을 남겼고, 그 위로 건조한 공기가 불며 물기가 말랐어요. 발자국 위로 퇴적물이 쌓여 단단한 퇴적암이 되었고, 주변에 화산이 터지는 등 온도가 올라가면서 원래 상태보다 더 안정화되어 발자국 화석이 단단하게 굳어졌죠. 35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하게 화석을 잘 볼 수 있는 이유예요. "
Q남해안에서만 볼 수 있나요?
임종덕 "지질학적 특성에 따라 우리나라는 경상도 쪽에 특히 중생대 백악기 지층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요. 반면 수도권에는 중생대 지층이 거의 없죠. 강원도에는 중생대 지층이 아예 없고 고생대 지층만 있어요. 그래서 대부분 중생대에 살았던 동물의 발자국 화석은 남해안 쪽에서 발견되는 거예요."
Q. 우리나라에서 뼈 화석보다 특히 발자국 화석이 많이 발견되는 이유가 뭘까요?
임종덕 "첫째, 뼈는 한 동물에 하나지만, 발자국은 여러 개를 남기기 때문이에요. 둘째로, 몽골이나 중국, 미국에 비해 뼈 화석이 적게 발견되는 건 우리나라는 땅이 작기 때문이죠. 그런데 단일 면적당 공룡 발자국 수가 많고, 그 종류도 매우 다양하게 발견되고 있는 건, 그만큼 한반도가 공룡들이 살기 좋은 환경이었다는 의미예요. 세 번째 이유는 한국의 지형, 지질 특성 때문이에요. 우리나라는 당시 남해안엔 거대한 호숫가가 있어 모래나 자갈밭보다 발자국이 잘 남을 수 있는 환경이었어요. 뼈 화석은 동물이 한꺼번에 휩쓸려 파묻히는 범람원에서 잘 발견된답니다."
Q. 우리나라뿐 아니라 스페인, 볼리비아 등 전 세계의 화석 산지를 많이 다니셨죠? 한국이 유네스코 자연유산에 등재되기 위해 개선할 점은 무엇인가요?
로클리 교수 "지금도 거의 완벽합니다. 유네스코 자연유산 등재를 놓고 경쟁 중인 볼리비아만 봐도 세계에서 가장 큰 화석 산지지만 경사가 매우 심해 줄을 달지 않으면 접근하기가 너무 어려워요. 또 관리가 잘 되지 않아 풍화작용에 의해 화석이 사라지고 있어요. 하지만 한국은 발자국 화석에 대한 접근성, 침식됐을 때 버티는 정도, 보존 상태, 정부 차원의 관리, 생물 다양성 등 모든 면에서 1등이에요. 10년 전에도 1등, 지금은 완벽히 1등이죠.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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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과학동아 12월 15일, [기획] 올해로 40년 한국은 공룡 발자국 천국!
[이혜란 기자 r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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