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엄리포트] 10년간 힉스 입자 1000만개의 외침 “표준모형이 옳다”
2012년 7월 4일 세계 과학계가 뜨거운 흥분에 휩싸였다.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거대강입자충돌기(LHC)에서 드디어 힉스 입자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표준 모형을 완성할 마지막 퍼즐로 여겨지던 힉스 입자를 발견한지 올해 10년이다. 물리학자들은 그동안 어떻게 힉스를 연구해왔을까. 힉스 입자는 입자물리학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간단히 말하면 지금까지 힉스 입자를 실험한 결과는 표준모형이 옳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김태정 한양대 물리학과 교수는 이 한 문장으로 힉스 입자 발견 이후의 10년을 요약했다. 그는 현재 거대강입자충돌기(LHC)에 있는 뮤온압축솔레노이드(CMS) 검출기 연구팀의 한국 대표를 맡고 있다. CMS는 LHC에 설치된 4개의 검출기 중 하나로, 2012년 아틀라스(ATLAS) 검출기와 함께 힉스 신호를 발견해냈다. 전 세계 57개국 6288명의 사람이 CMS에 참여하고 있으며, 한국은 약 110명이 소속돼 있다.
힉스 입자를 검출했다는 소식이 화제가 됐던 이유는 뭘까. 힉스 입자가 현대물리학의 근간인 ‘표준모형’이 예측한 입자 중 마지막으로 발견된 입자였기 때문이다.
표준모형은 물질을 구성하는 페르미온 입자 12개(쿼크 6개, 렙톤 6개)와, 페르미온 입자들 사이에서 힘을 전달하는 게이지 보존 입자 4개, 그리고 힉스 입자까지 총 17개의 입자로 자연계를 설명한다. 1960년대 말부터 쿼크가 발견되기 시작해 16개의 입자가 차례로 발견됐지만 유독 힉스 입자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다 2012년에야 힉스로 추측되는 입자가 발견된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해야할 일은 발견한 힉스 입자가 실제로 표준모형에서 예측한 성질을 가지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힉스 입자를 최대한 많이 만들어 실험 데이터를 쌓아야 한다. “LHC에서는 만들어진 힉스 입자의 약 0.3%를 검출해냅니다. 지난 10년간 약 1000만 개의 힉스 입자가 만들어졌으니 대략 3만 개의 힉스 데이터가 모였다고 볼 수 있겠네요.” 올해 2월까지 CMS 연구팀 한국 대표를 맡았던 양운기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가 계산했다.
1000만 개의 힉스 입자를 만들어 내기 위해 물리학자들은 양성자를 엄청난 에너지로 가속해 충돌시키는 실험을 반복했다. 두 양성자가 충돌하면 수천 개의 입자가 파편처럼 퍼진다. 폭죽에서 불꽃이 터지는 광경과 비슷한 일이 프랑스와 스위스 국경지대 지하 100m에서 일어난다고 상상해보라.
이렇게 만들어지는 입자들 중 힉스 입자는 극히 드물고 만들어졌다 할지라도 겨우 10 마이너스 22제곱 초 만에 붕괴해 다른 입자로 변한다. 그러니 연구팀은 힉스 입자가 아니라 힉스 입자의 흔적을 찾는다.
김 교수는 “힉스 입자를 발견하는 건 빅데이터를 체로 걸러 흔적을 찾는 과정에 가깝다”며 “2012년에는 힉스 입자가 붕괴하며 만들어진 광자 2개의 흔적을 발견해 힉스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라 설명했다. 양성자 충돌 과정에서 다양한 에너지 크기를 가진 광자가 만들어지지만, 힉스 입자가 붕괴돼 나온 광자 신호 2개의 에너지 합은 힉스의 에너지인 125GeV(기가전자볼트)를 가리킨다. 광자 그래프의 125GeV 대에서 튀어나온 신호가 힉스의 흔적이었던 셈이다.
연구자들은 포착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힉스의 성질을 파악해 나갔다. 힉스 입자의 질량은 0.1% 오차 범위에서 125GeV로 측정됐다. 다른 기본 입자들과 얼마나 상호작용하는지도 실험했다. 힉스 입자가 정말 물질에 질량을 부여하는 성질이 있다면 무거운 입자일수록 힉스 입자와 강하게 상호작용할 텐데, 실험 결과는 예측과 같았다. 그 밖의 실험에서도 힉스 입자의 성질은 표준모형을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 조각답게 표준모형의 예측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 표준모형의 빈틈을 찾아라
“10년 동안 알아낸 힉스의 성질은 표준모형의 예측에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한편으론 불안했죠.” 김 교수는 의외의 소회를 밝혔다. 오늘날의 표준모형은 암흑물질이나 중력 등을 설명할 수 없는 불완전한 이론이다. 표준모형과 일치하지 않는 현상을 발견하면 새로운 물리학으로 나아갈 길이 열린다.
양 교수는 이를 위해 힉스 입자의 성질을 더 연구하고 있다. 힉스 입자와 암흑물질의 상호작용 여부 등 힉스 연구를 더 발전시키면 표준모형의 빈틈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럴 뻔한 기회도 있었다. 2015년 12월 전 세계는 힉스의 후속 입자가 발견됐다는 뉴스로 시끌벅적했다. CMS, ATLAS에서 동시에 기존의 이론으로는 계산되지 않는, 매우 높은 에너지를 가진 광자 쌍 이상 신호(bump)가 발견됐다는 뉴스였다. 이전에 검출된 힉스보다 ‘무거운 힉스’가 검출됐을 가능성, 또는 완전히 새로운 입자가 검출돼 표준모형을 확장할 가능성이 있었다. 표준모형을 넘어선 이론으로 각광받는 ‘초대칭 이론’에서는 힉스가 하나가 아니라 다섯 가지나 존재한다고 예측하기 때문이다.
“물리학자들에겐 흥분되는 순간이었죠. 관련 논문만 500편가량 쏟아질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 데이터를 둘러싸고 연구를 했어요. 결국 데이터 오류로 밝혀졌지만요.”
양 교수는 그럼에도 얻은 것이 많은 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연구실의 학생들과, 나아가 전 세계 이론물리학자들과 실험물리학자들이 함께 토론을 거듭하며 데이터를 분석하고 이론을 만드는 경험을 쌓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경험이 학생들에게 엄청난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 새로운 입자 찾기 위해 검출기 업그레이드
LHC는 7월부터 세 번째 가동(Run 3)을 시작했다. 그새 CMS에는 더 정밀한 검출기가 덧붙여졌다. “실험 장비는 이론을 검증하고 자연 현상의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 필수입니다.” 이경세 고려대 극한핵물질연구센터 연구원의 설명이다.
지난 11월 3일 CMS 검출기에 쓰이는 RPC (Resistive Plate Chamber저항판 검출기)를 만드는 극한핵물질연구센터의 한국검출기연구소를 방문했다. RPC는 뮤온 입자를 찾아내는 검출기로, 실험실 책상 위에는 부채꼴처럼 생긴 넓은 검출기 부품이 여럿 쌓여있었다.
이 연구원은 1999년에 RPC 연구를 시작해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RPC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제작된 RPC는 지난 2012년부터 지금까지 힉스가 붕괴되면서 발생하는 여러 채널 중 특히 뮤온 입자들을 생성하는 사건을 효과적으로 측정하며 힉스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혹시 CMS 사진 보신 적 있으세요? 저희가 만든 RPC는 입자 충돌 지점을 둘러싼 공간에 들어갑니다.” CMS는 양성자 충돌 과정에서 발생하는 광자, 전자, 강입자(2~3개의 쿼크로 이루어진 입자), 뮤온 신호를 찾는 각각의 검출기들이 충돌 지점을 양파껍질처럼 감싼 구조로 만들어졌다. RPC는 이중 가장 바깥 껍질에 들어간다. RPC 내부에 좁은 틈이 있는데, 이 틈에 특수 기체를 넣고 고압의 전기장을 걸어주면 통과하던 뮤온이 특수 기체를 이온화시키며 신호를 보내는 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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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욱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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