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그림 그리는 LPGA 챔피언
화가 고갱은 두뇌가 명석하고 이재(理財)에 밝았다. 성인이 된 뒤 증권회사에서 일했다. 그런데 그가 진심으로 원한 것은 그림 그리기였다. 틈틈이 그림을 사 모았고 아마추어 모임에 들어가 직접 그리기도 했다. 그러다 파리 증권시장이 붕괴하자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당시로선 늦은 35세에 전업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위대한 화가 중엔 고갱처럼 다른 일을 하다가 붓을 쥔 사례가 꽤 있다. 아버지가 개신교 목사였던 고흐는 신학교 입시에 낙방하자 진로를 바꿔 화가가 됐다. 화가가 되기 전 전도사, 서점 직원 등을 거쳤다. 초현실주의의 아버지라는 앙리 루소는 세관원이었고, 야수파 화가 마티스는 변호사 자격증을 가진 법률 사무소 서기였다. 제프 쿤스도 월스트리트에서 주식 중개인으로 일했다.
▶모두 붓의 자력에 끌려 들어간 사람들이다. 고갱은 퇴직 후 캔버스 공장에서 박봉을 받으며 그림을 그렸다. 가난해졌다는 이유로 아내에게 버림받았다. 현대인의 우울을 표현한 걸작 ‘황색의 그리스도’는 그 시절 외로움과 가난 속에서 탄생했다. 마티스는 충수염에 걸려 입원했다가 어머니가 “무료함이나 달래라”며 건넨 물감 덕에 몰랐던 세상과 만났다. 퇴원 후 복직했지만 공증서에 꽃과 얼굴을 그렸다. 결국 직업을 바꿨다. 서머싯 몸의 장편 ‘달과 6펜스’는 고갱에게서 모티브를 따 왔지만 현실(6펜스)을 벗어나 이상(달)을 좇는 모든 예술가 이야기이기도 하다.
▶LPGA에서 뛰는 프로 골퍼 전인지가 붓을 들었다. 지난 5월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고 이달 전시회도 연다. 지난 6월, 4년 가까운 슬럼프를 이겨내고 메이저 대회 우승컵을 들어 올린 그는 “온종일 골프만 생각하면 감당하기 어려운 스트레스에 시달리는데, 골프 이외의 취미와 화제를 갖고 세상을 더 크게 보게 됐다”고 했다. 그의 말에서 그림의 또 다른 효능을 본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전인지처럼 자신의 세계에서 더 높은 곳에 이르기 위해 그림의 도움을 받는 사람도 많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퇴임 3년 뒤인 2012년부터 그림을 그렸다. 재임 중 만난 각국 지도자 초상화를 그려 전시회를 열고 화집도 낸 그는 “그림을 만나고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인생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국내에선 가수 조영남·솔비, 배우 하정우·구혜선 등이 두 세계를 병행한다. 저마다 붓을 드는 이유는 다르지만, 그림 덕에 삶이 충만해진 것은 분명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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