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위권 경제대국이 방재는 후진국… 언제까지 소 잃고 외양간 고칠 건가”

이옥진 기자 2022. 12. 17.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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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10·29 이태원 참사’ 50일
방재 전문가 정상만 원장
정상만 한국재난안전기술원장이 14일 이태원 참사 현장에 시민들이 남긴 메모를 보고 있다. 그는 “(사고 당시) 일방 통행만 시켰어도, 다른 골목으로 인파 분산만 했어도, 경고 사이렌만 울렸어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라며 “지난 재난들로부터 교훈을 얻어 다시는 유사 사고가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고 했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어른들이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고 가슴 아픕니다. 좋은 데 가서 편히들 쉬세요.” “잊지 않겠습니다. 안전한 국가, 나라다운 나라 만들겠습니다.”

14일, 158명의 생명을 앗아간 ‘10·29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이태원 골목은 다른 곳보다 유독 더 춥고 어둡게 느껴졌다. 이태원역 1번 출구와 해밀톤호텔 본관 서편 가벽에는 추모객이 붙여놓은 메모가 빼곡히 붙어 있었다.

이곳에서 국내 방재 분야 최고 전문가로 꼽히는 정상만 한국재난안전기술원장을 만났다. 현장을 둘러보던 정 원장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현장 곳곳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참사가 난 골목길 경사가 6도 정도 된다며 “많은 사람이 양 방향으로 무질서하게 다닐 때는 굉장히 위험하다”고, 해밀톤호텔이 불법 증축한 가벽을 가리키며 “돈 때문에 안전 관리는 나 몰라라 한 것”이라고 했다. 이어 현장 인근의 다른 골목들을 열거하면서 “조금만 관심을 기울였다면, 미리 인파를 분산해 참사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경제 규모만 선진국이지, 재난 안전 면에서는 상대적 후진국”이라고 했다. 17일은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지 50일째 되는 날이다.

◇30년 재난 전문가, 이렇게 황당한 참사는 처음

-이태원 참사는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다.

“(참사 다음 날) 이른 아침에 150명 넘게 사망했다는 소식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밀폐된 공간도 아닌 도로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유명을 달리했다. 이제껏 숱한 재난을 봐왔지만, 이렇게 황당한 참사는 처음이다.”

-참사 원인은 무엇인가.

“사고 발생 전 여러 징후가 있었고, (시민의) 신고도 11건이나 있었다. 당국과 지자체가 너무 안일했다. (행사) 주최자가 없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할 수 있나. 돌이켜 봐도 답답한 일이다. 청년 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도 문제였다. (정부가) 정치적 시위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이미 수년 전 젊은이들 사이에선 크리스마스 이상의 축제가 된 핼러윈은 무시했다. 가장 큰 문제는 예방·대비 같은 조치를 등한시하고 사후 수습에만 집중하는 우리 재난 관리 시스템이다. 사후 수습은 후진국도 한다.”

-이태원 참사를 ‘후진국형 사고’라고 했다.

“이태원 참사가 압사 사고라 후진국형이란 것이 아니다. 발생과 수습 과정이 후진국형이다. 징후 감지 실패, 대비 미흡, 대응 조치 미숙 등 일련의 과정이 그렇지 않은가. 우리나라 안전사고 사망률은 OECD 평균보다 높다. 미국·일본 같은 방재 선진국을 A급이라 치면, 우리는 C급 정도다.”

-우리 재난 관리 시스템이 예방·대비에 소홀한 이유는.

“우리나라는 대비에 30%를, 사후 수습에 70%를 투자한다. 일본과 비교하면 반대다. 사후 수습은 굉장히 단기적이고 가시적이다. 보여주기, 생색내기다. 재난을 정쟁화하는 경향도 생겼다. 정치권에서 근본 대책을 마련하지 않은 채 (재난을) 싸울 구실로 이용만 하다,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잊는 행태가 반복돼왔다.”

-대안은 뭘까.

“대비가 수습보다 훨씬 더 경제적이라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재난이 안 일어날 순 없다. 예방과 대비를 통한 피해 최소화가 해법이다. 구체적으로 이태원 참사 같은 사고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인파 관리 대책을 마련하고 실행해야 한다. 문제는 대체로 조사, 원인 분석, 대책 수립까지는 잘 진행되는데, 마지막 단계인 실행이 잘 안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재난 관리 시스템을 예방·대비 중심으로 획기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이태원 참사 현장 인근인 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 1번 출구. 시민들이 추모의 의미로 가져다 놓은 꽃다발, 편지, 음료수, 소주 등이 놓여 있다. 전날 비가 와서 자원봉사자들이 비닐로 덮어 놓았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정쟁은 본질 흐려, 세월호 이후 뭐가 달라졌나

이태원 참사 발생 직후부터 현재까지, 이를 둘러싼 정치권의 갈등은 좀처럼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정 원장은 “정쟁은 재난 안전 관리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세월호 사고, 이태원 참사 등 국가적 비극이 정치적 싸움의 소재가 되고 있다.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일이다. 세월호 사고 이후에 무엇이 달라졌나. 재난 안전과 관련해 획기적 변화가 있었나. 이태원 참사도 그렇게 될까 싶어 걱정이다.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유엔에서 자연 재난 안전 이슈를 선점하는 국가가 됐다. 2015년 센다이(仙臺)시에서 천명한 ‘센다이 방재 프레임워크’가 좋은 예다. 방재 패러다임을 종전 ‘복구 후 피해 관리’에서 ‘선제 예방’으로 변화시켰다. 비록 소를 잃은 뒤지만, 외양간을 제대로 고친 사례다.”

-일각에서는 특정인, 특정 기관에 이태원 참사 책임을 묻는다.

“확실한 원인 규명이 우선돼야 한다. 한쪽의 문제라기보다 재난 관리 전반의 문제로 조명해야 재발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시스템적 개선책을 마련할 수 있다. 마녀사냥식 책임 전가 행위는 결과적으로 재난 안전 선진화에 걸림돌이 된다.”

-정부의 사후 대처는 적절하다고 평가하나.

“공식 사과가 늦은 점, 현재 재발 방지를 위한 법·제도적 대책 마련의 동력이 없는 점이 아쉽다.”

정 원장은 “우리나라는 선진국과 비교해봤을 때 사회 재난의 비중이 큰 편”이라며 “자연 재난은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지만, 사회 재난은 예방이 가능한데도 방치하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다.

-사회 재난이 반복되는 이유는.

“재난이 발생한 뒤 여론이 끓다가, 대책 마련은 제대로 안 하고 잊어버리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2014년 세월호 사고는 1993년 서해페리호 사고와 놀랍도록 비슷하다. 좋지 않은 기상 상황, 무리한 과적(과승), 당국의 관리 감독 부실 등이 똑같았다. 선장이 배를 버리고 도망갔다는 점에서 세월호는 서해페리호보다 오히려 더 상황이 나빠졌다. 재난이 한번 일어나면 거기서 교훈을 얻고 학습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선 잘 안 된다. 정신을 안 차리는 사람이 너무 많다.”

-지난여름엔 강남이 또 침수됐다.

“2010년, 2011년에도 강남역 일대가 침수됐다. 올해와 데칼코마니처럼 똑같다. 당시에 오세훈 시장 시절이었는데, 7곳에 대심도 빗물 터널(지하 저류 시설)을 만들기로 했다. 그런데 시장이 바뀌면서 유야무야됐고, 결국 양천구 한 곳에만 대심도 터널이 만들어졌다. 이번에 양천구는 큰 피해가 없었다. 대심도 터널의 경제성이 문제라면 다른 나라 사례를 참고할 수 있다. 일본 도쿄의 간다가와(神田川) 환상 7호선 대심도 터널은 유사시 방공호로 활용하고,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있는 스마트(SMART) 대심도 터널은 평시에 차로로 쓴다. 이 밖에 지역 맞춤형으로 폭우를 대비하고, (재난 시) 실시간으로 대국민 상황 전달 시스템을 가동하는 것도 필요하다. 예방책은 다 있다. 난리가 났을 때만 관심을 가져서 문제다.”

정 원장은 2016년 우리나라를 강타한 태풍 ‘차바’와 비슷한 시기 미국에 상륙한 허리케인 ‘매튜’에 대한 한·미 각 정부의 대응을 비교했다. 우리나라는 막대한 피해가 발생한 뒤에야 특별재난지역을 지정하는 등 사후 대책에 분주했고, 미 정부는 허리케인 상륙 직전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대피령을 내리는 등 사전 대책에 집중했다는 것. “우리는 사후에 보상금 지급 등 생색내기에 치중한다. 반면, 미국은 사전에 대응하는 게 훨씬 더 이득인 것을 알고 있다.”

정상만 원장이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골목 가운데 서 있는 모습. 이 골목은 폭이 4m가량인 좁은 비탈길이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재난에 강한 안전 사회를 꿈꾼다

1956년생인 정 원장은 1981년 고려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한 뒤 미 유타주립대·아이다호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4년부터 공주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국립방재연구원장, 한국방재학회장 등을 역임했다.

-어쩌다 방재 전문가가 됐나.

“고향이 경남 진주다. 남강 하류인데, 홍수가 나는 걸 참 많이 봤다. 이게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는 걸 깨닫게 됐고, 대학 때 자연스럽게 풍수해에 관심을 가졌다. 유학 시절 국토교통부 산하 한국건설기술연구원에 스카우트돼 나라의 혜택을 받았다. 보답이라고 하면 거창하지만,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일에 기여해야겠다고 생각해왔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고는.

“미 9·11 테러다. 재난은 저렇게 대응해야 한다고 느꼈다. 당시 세계무역센터에 본사가 있던 모건스탠리는 건물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임직원 약 2700명을 무사히 대피시켰고, 24시간 만에 영업을 재개했다. 분기마다 매뉴얼에 따라 비상 계단으로 전 직원이 대피하는 재난 대피 훈련을 하는 등 위기관리 시스템이 잘 돼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 놀라운 것은 희생자를 기리는 방식이다. 웅장하게 무역센터 빌딩을 재건했고, 추모 공원을 만들었다. 희생을 기억하면서, 이런 비극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다.”

-가슴에 사무친 사고도 있나.

“2014년 경주에서 일어난 마우나리조트 참사다. 외벽과 지붕을 철골 구조로 만든 뒤 주변을 샌드위치 패널로 덧대는 PEB 공법으로 지은 건물이었는데, 그마저도 부실 시공 건물이었다. 습설(습기를 머금은 눈)이 지붕에 쌓여 건물이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대학 입학을 앞둔, 피지도 못한 청춘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번 이태원 참사와 비슷하다.”

-재난을 가까이서 들여다보기가 괴롭지 않은가.

“가끔 ‘나는 왜 만날 이런 일만 해야 하나’란 생각도 든다. 작은 웃음, 농담도 염려스러울 때가 많다. 그리고 안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언론 등에서) 연락이 오는데, 그때마다 참 마음이 어렵다. 하지만 내 전문 영역이니,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재난이 터진 뒤 코멘트를 하는, 지금과 같은 일이 줄기를 간절히 바란다.”

-당신이 재난 컨트롤타워 책임자라면 가장 먼저 할 일은.

“정부 조직 개편을 통해 재난 안전을 독립 부처에서 다룰 수 있게 하겠다. 책임자도 장관급으로 격상하고. 재난 안전 전문 인력 육성도 필요하다.”

-어떤 사회를 바라나.

“재난이 닥쳤을 때 회복 탄력성(resilience)이 있는 사회, 재난 위험을 경감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개발(sustainable development)을 하는 사회가 돼야 사람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정 원장은 “국방 투자와 방재 투자는 같은 개념”이라고 했다. “단기적으로 이익이 산출되지도 않고 오히려 손해처럼 보이지만, 유사시에 큰 이득을 보게 돼 있다는 점에서 같다. 한발 앞선 대응, 현장에서 작동하는 방재에 대한 투자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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