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와인도 잔 따라 다른 맛… ‘내가 마지막 되지 말자’ 절박함으로 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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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년 이어온 와인잔 명가
11대손 막시밀리안 리델
크리스마스에 가장 어울리는 술로 와인을 꼽는 데 이견이 없을 듯하다. 와인을 와인 전용 잔에 마시는 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60여 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과거 와인잔은 일반 물잔과 별 차이 없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두께가 얇은 달걀형 몸통에 가늘고 긴 스템(손잡이)과 납작한 받침이 달린 오늘날의 와인잔은 1958년 오스트리아 리델(Riedel)사가 처음 고안했다.
지난달 21일 서울 잠원동 WSA와인아카데미에서 만난 막시밀리안 리델(46)은 “과거 와인잔은 테이블을 장식하는 기물에 불과했고, 화려한 색과 장식이 덧붙여진 데다, 잘 깨지지 않도록 두꺼웠다”며 “와인을 제대로 즐기는 도구로서의 와인잔은 나의 할아버지 클라우스 리델이 세계 최초로 발명했다”고 했다.
막시밀리안은 모차르트가 태어난 1756년부터 266년째 크리스털 제품을 생산해온 리델 가문의 11대손. 국내에서 리델은 2000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건배할 때 사용한 잔으로 유명세를 탔다.
◇화려한 와인잔 선호하는 한국시장
-와인이 아닌 ‘와인잔 시음회’를 하러 왔다고 들었다.
“잔에 따라 와인 맛이 얼마나 달라지는지는 체험이 아니면 깨닫기 힘들다. 1년 내내 전 세계를 돌며 와인잔 시음회를 수백 차례 진행한다.”
-같은 와인이 잔에 따라 맛이 다를 수 있나.
“잔에 따라 전혀 다른 와인으로 착각할 수 있을 정도다. 와인잔은 와인이 갖고 있는 잠재력을 100% 발휘할 수 있게 돕는 정교한 도구라는 게 우리 리델이 내리는 와인잔의 정의다.”
-코로나 기간 와인업계의 우려와 달리 한국에선 이른바 ‘홈술족’이 늘면서 와인과 와인잔 등 소비가 급증했다.
“전 세계적으로 마찬가지였지만, 한국은 특히 그랬던 것 같다. 리델에 한국은 중국과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 세 번째로 큰 시장이다.”
-한국 시장만의 특징이 있나.
“한국 소비자들은 화려하고 컬러풀한 제품을 유난히 선호한다. 와인잔 스템에 색을 집어 넣은 ‘파토마노’ 라인은 한국·중국·일본 등 동아시아에서 두루 인기다. 하지만 일본에선 검정, 중국에선 빨강을 선호하는 반면, 한국에선 파랑·핑크·오렌지·보라·민트 등 모든 색이 고루 잘 나간다.”
리델의 역사는 혁신의 역사다. 크리스털 판매상이던 리델 가문은 3대 요한 레오폴트 리델이 1756년 오늘날 체코에 속한 보헤미아 지역에 크리스털 생산 공장을 세우며 크리스털 업체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4대 안톤은 샹들리에로 사업 방향을 틀었고, 5대 프란츠는 우라늄을 이용해 형광 색상을 넣었다. 6대 요세프는 석탄 화력으로 유리구슬(bead)과 이보다 큰 덩어리 블랑크(blank)를 대량 생산해 가공 공장에 팔았고, 7대 요세프는 600여 가지 색깔을 크리스털에 입혔다. 8대 발터는 샹들리에와 향수병을 생산했다.
리델 가문이 와인잔으로 명성을 얻은 건 9대 클라우스 때부터다. 클라우스는 1958년 다리가 가늘고 길면서 몸통은 볼록하고 두께가 얇은 와인잔을 최초로 선보였다. 와인 본연의 풍미를 정확하게 맛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프랑스 부르고뉴 피노누아 포도 품종으로 만든 와인 전용 ‘부르고뉴 그랑 크뤼’는 와인잔의 개념을 완전히 바꾼 혁신이었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현대 디자인 명제를 완벽하게 반영한 이 와인잔은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영구 소장됐다. 클라우스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73년 포도 품종마다 형태가 다른 ‘소믈리에’ 시리즈를 내놓았다.
10대 게오르크는 포도 품종에 따라 형태가 다른 와인잔을 업계 최초로 기계로 대량 생산한 ‘비눔’ 시리즈를 내놓는 한편, 독일 최대 크리스털업체 ‘나흐트만’과 자회사인 와인잔 생산업체 ‘슈피겔라우’를 인수하며 리델을 글로벌 기업 반열에 올렸다. 11대 막시밀리안은 스템에 색을 넣은 ‘파토마노’와 스템을 없애 좁은 찬장에도 쉽게 수납할 수 있도록 한 ‘오(O)’ 시리즈, 잔 안쪽 표면에 미세한 굴곡을 넣어 와인 향을 끌어올리는 ‘옵틱(optic)’ 기술을 활용한 ‘퍼포먼스’ 시리즈를 선보였다.
◇'마지막이 되지 말라’가 가문의 신조
-스템에 색을 넣는 아이디어를 직접 냈다고.
“파티에서 와인을 마시던 중 ‘다른 사람의 와인잔과 섞이지 않으면 좋을 텐데’란 생각이 들었고, 스템에 색을 집어 넣는 아이디어로 이어졌다.”
-옵틱 기술은 어떻게 개발했나.
“프랑스 샴페인 ‘크루그(Krug)’에서 로제 샴페인용 잔을 만들어 달라고 의뢰했다. 사실 샴페인은 좁고 긴 기존 샴페인용 잔보다 크고 불룩한 피노누아 포도 품종으로 만든 와인용 잔에 마셨을 때 풍미가 극대화된다. 그렇게 말하자 크루그는 ‘피노누아 와인잔은 너무 커서 샴페인이 적어 보인다’며 거부했다. 어떻게 하면 크기는 작으면서도 큰 잔과 동일한 수준의 기능을 가진 잔을 만들까 고민하다 문득 ‘내부에 굴곡을 넣으면 어떨까’란 생각이 떠올랐다. 수제 와인잔은 녹인 유리를 묻힌 대롱에 장인이 입으로 바람을 불어 넣어 만드는데, 바람을 불어 넣었다가 다시 빨아내면 안쪽에 미세한 굴곡이 생긴다. 이를 통해 내부 표면적을 3분의 1 늘릴 수 있었다.”
-리델에는 디자이너가 따로 없나.
“내가 새로운 와인잔 아이디어부터 제품 완성까지 책임진다. 아버지 게오르크 리델, 할아버지 클라우스 리델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나.
“‘어떻게 하면 와인 본연의 풍미를 최대한 즐길 수 있을까’를 항상 고민한다. 그러려면 와인에 대해 많이 알아야 한다. 와인 생산자들과 꾸준히 만나 의견과 지식을 얻는다. 지구온난화로 와인 생산환경이 달라지는 요즘 이들과 만남은 특히 중요하다. 물론 크리스털과 와인잔 생산에 대한 깊은 이해가 뒷받침돼야 한다. 이 모두를 우리 리델 가문처럼 두루 갖춘 사람은 찾기 힘들다.”
-가문의 모토가 ‘불을 지펴라, 재를 남기지 말라(stoke the fire, do not save the ashes)’라고.
“재 안에 숨은 작은 불씨까지 남김 없이 이용해 불길을 일으키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건 대외적인 거고, 진짜 우리 가문의 모토는 ‘마지막이 되지 말라(don’t be the last)’이다. 가업(家業)을 키우지 못한다면 최소한 말아먹지 말고 다음 세대로 이어가라는 뜻이다. ‘내가 리델 가문의 마지막이 돼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 11대까지 이르게 한 것 같다(웃음).”
◇와인잔은 맨정신에 닦아라
리델 가문과 기업은 2차대전 직후 끝날 뻔했다. 체코를 점령한 나치 독일은 리델 공장을 접수하고 레이더 핵심 부품인 브라운관 생산을 강요했다. 8대 발터는 그때까지 38㎝였던 브라운관 직경을 76㎝로 2배 키우며 레이더 해상도를 혁신적으로 높였다.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16일 뒤 발터는 모든 생산시설과 재산을 빼앗긴 채 소련군에 전범(戰犯)으로 끌려가 시베리아 수용소에 수감됐다가 소련 유리산업 재건에 투입됐다. 5년간 일하기로 계약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모스크바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했다가 기밀 누설 명목으로 24년형을 선고받았다. 스탈린이 죽고 아데나워 독일 총리가 전쟁포로 송환을 위해 백방으로 뛴 끝에 10년 만인 1955년 겨우 풀려났다.
발터가 감옥살이 하는 동안 아들인 9대 클라우스는 독일군에 징집됐다가 미군에 포로로 잡혀 10개월간 수감 생활을 했다. 그는 1946년 포로 이송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그가 떨어진 곳은 오스트리아였다. 동료 포로의 고향 마을로 눈을 헤치고 17㎞를 걸었다. 한 남성이 “여기 리델 집안 사람이 있느냐”며 찾아왔다. 오스트리아의 세계적 크리스털 업체 ‘스와로브스키’ 창업자 다니엘 스와로브스키였다. 클라우스의 증조부인 6대 요세프 밑에서 크리스털 제조를 배운 스와로브스키는 클라우스를 아들처럼 가까이 뒀고 대학에 보내 화공학을 배우게 했다.
스와로브스키는 오스트리아 산골 도시 쿠프슈타인에 있는 유리공장 인수를 제안받았으나 “유리잔을 만드는 건 회사 품격에 맞지 않는다”며 거절했다. 대신 클라우스에게 돈을 빌려줘 파산한 공장을 인수하게 했다. 오스트리아로 온 발터와 클라우스 부자는 1957년 공장을 수리해 유리잔 생산을 시작했다. 잔의 모양과 크기에 따라 와인 맛이 다르다는 걸 발견했고, 이듬해 ‘부르고뉴 그랑 크뤼’ 와인잔을 내놓으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번 한국에 소개하는 ‘벨로체’는 어떻게 개발했나.
“지난 9월 출시한 최신 와인잔 라인이다. 기계로 생산하지만 장인이 입으로 불어 만드는 수제 와인잔보다도 가볍고 얇은 건 벨로체가 세계 최초다. 지난해 우리가 개발한 최첨단 기계 덕분에 가능해졌다. 완벽하게 일관된 형태의 와인잔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됐다.”
-기계가 사람을 완전히 대체할 날이 올까.
“이미 오고 있다. 우리가 원해서가 아니다. 와인잔을 만들 장인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리델에서 일하는 장인들도 자기 자식들을 의사나 변호사로 키우려 한다. 수제 와인잔은 앞으로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거다.”
-리델 잔은 너무 얇아 잘 깨진다는 불만이 있다. 계속 팔려고 일부러 그렇게 만든다는 의심도 있다.
“얇은 와인잔이 트렌드다. 소비자들이 갈수록 얇은 와인잔을 원한다. 얇을수록 입술에 대거나 손으로 잡았을 때 촉감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와인잔만 사용할 수는 없나.
“죽을 때까지 오로지 하나의 포도 품종으로 만든 와인만 마신다면(웃음). 모든 와인에 적합한 하나의 와인잔은 존재하지 않는다. 레드와인의 경우 포도 껍질 두께에 따라 3개의 잔으로 가능할 듯하다. 껍질이 얇은 피노누아·네비올로, 중간 두께인 시라·그르나슈, 두꺼운 카베르네 소비뇽·메를로·카베르네 프랑·말벡·프티 베르도는 각각 같은 잔에 마셔도 된다. 화이트와인은 포도 품종마다 너무 달라서 불가능하다. 각각 다른 잔이 필요하다.”
-와인잔을 제대로 사용하는 법을 알려달라.
“와인을 몸통의 불룩한 부분 아래로 채운다. 공간을 남겨둬야 향이 충분히 피어 오를 수 있다. 와인을 마시기 전 잔을 거의 수평이 되도록 기울여 360도 돌린다. 와인으로 와인잔을 코팅하는 거다. 그러면 와인 향이 더 풍성하게 올라온다. 코를 살짝 잔에 갖다 대지 말고 안으로 깊숙이 넣어야 제대로 향을 맡을 수 있다.”
-잔을 깨트리지 않고 오래 사용하는 법이 있을까.
“맨정신에 닦는 거다. 밤에 취했을 때 닦지 말고 식탁이나 싱크대에 그대로 뒀다가 다음 날 아침 술 깨고 난 뒤 닦기를 권한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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