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터·크림·사프란 버무린 파스타… 연인의 은밀한 고백처럼 감미롭네
[정동현의 pick] 크림 파스타
대학에 들어가서 크림 파스타를 처음 먹어봤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피자를 시키면 딸려 오는 오븐 파스타 외에 다른 파스타를 먹어본 적이 없다. 대학 신입생 시절, 동기끼리 모여 당시 유행하던 패밀리 레스토랑에 갔다. 테이블에 놓인 크림 파스타를 보며 “이게 뭐냐” 묻지 않고 입을 닫았다. 조용히 하얀 면을 입에 넣었다. 너른 유지방의 풍미가 혀를 뒤덮었다. 거친 부분 하나 없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맛에 바닥까지 긁어 먹었다. 누구는 이탈리아 정통 파스타에는 크림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크림을 구하기 힘들던 시절 이야기다. 더구나 크림의 범위를 버터, 달걀 노른자, 치즈 같은 혼합물로 확장하면 엄연히 파스타 소스의 중요한 부분이다.
먼저 흔히 아는 크림 파스타를 맛보고자 가야 할 곳은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 ‘록키’다. 가로수길 메인 거리에서 벗어난 위치, 반지하 계단을 내려가니 낮은 천장에 그윽한 조명과 아기자기한 장식이 눈에 들어왔다. 미국 산기슭 어딘가 오두막 산장에 온 듯한 분위기만큼 스테이크와 파스타 같은 미국식 메뉴가 주를 이뤘다.
‘스위스식 감자채전’이라는 부제가 붙은 뢰스티(rostie)는 얇게 썰어서 버무려 부친 감자채전 위에 베이컨과 달걀 프라이, 사워크림을 올렸다. 튀김을 아이스크림에 찍어 먹을 때처럼 죄책감이 드는 조합이었지만 포크를 멈출 수는 없었다.
페퍼크림 스테이크 파스타는 후추를 굵게 갈아 크림 소스에 섞은 뒤 짙게 졸여 스파게티에 비벼 냈다. 그 위에는 숯불에 구운 스테이크를 올렸다. 크림에 후추를 넣은 소스는 흔히 스테이크에 곁들이는 데 쓰인다. 뜨겁게 타오르는 고추의 매운맛과 달리 향을 발산하며 톡 쏘는 듯 아린 맛을 가진 후추는 크림을 만나 조금은 온순해졌다. 자칫 느끼할 수 있는 크림의 밋밋한 느낌도 후추를 만나 사라졌다. 스테이크는 페퍼크림 소스를 남김없이 먹는 용도 같았다.
가로수길에서 압구정역 쪽으로 걸어 나오면 언덕배기에 ‘끌림 이탈리아’라는 집이 있다. 큰 유리창으로 전면을 낸 가게는 긴 바 테이블 너머로 주방이 아담하게 자리했다. 주인장 둘은 주방에 서서 눈빛을 교환하며 부산스럽지 않게 조용히, 하지만 정확하고 빠르게 음식을 냈다.
메뉴 대부분이 파스타였다. ‘스피니치 크림 라비올리’는 이탈리아식 만두인 라비올리 안에 크림, 시금치, 베이컨을 넣었다. 소스는 햇볕에 말린 토마토와 단호박을 써서 단맛과 산미를 동시에 살렸다. ‘트러플 오일 버섯크림 빠빠르델레’는 널찍한 생면에 버섯을 크림에 넣고 졸인 뒤 트러플 오일로 마무리했다. 생면에 얇게 코팅한 크림 소스에는 산과 땅의 향기를 간직한 버섯 맛이 배경을 이뤘다. 트러플 오일은 그 위를 뒤덮은 짙은 안개와 같아 모든 맛에 잊히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발길을 강북으로 돌려 통의동에 가면 한옥에 들어선 ‘오스테리아 소띠’가 있다. 작은 마당을 개조해 의자를 놓고 안방이 있던 자리에는 주방을 앉혔다. 점심 나절, 사람들은 비스듬히 들어오는 햇빛을 받으며 오래된 집에 앉았다. 모차렐라 치즈와 이탈리아 베이컨인 판체타, 밀가루·버터·우유로 만든 베샤멜 소스를 켜켜이 쌓아 만든 라자냐는 로마 유적의 단면을 보는 듯했다. 질퍽한 느낌 없이 수분을 정확히 날려 구운 라자냐는 먹을 때마다 층마다 풍기는 각기 다른 맛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특히 바질은 자칫 밋밋할 수 있는 라자냐의 맛에 확실한 존재감을 실어줬다.
셰프 스페셜이라는 마크가 찍힌 ‘사프란 뵈르블랑’은 오후의 햇살도 이겨내는 밝은 황금빛을 띠고 있었다. 본래 화이트와인과 식초, 다진 샬롯을 끓인 뒤 차가운 버터를 조금씩 녹여가며 만든 소스가 뵈르블랑이다. 이 집의 뵈르블랑은 추가로 크림을 넣어 밀도가 더 높고 질감이 부드러웠다. 여기에 세계에서 가장 비싼 향신료로 꼽히는 사프란을 더했다. 사프란 특유의 차갑지만 달콤한 향이 연인의 은밀한 고백처럼 몸을 달아오르게 했다. 잘게 다진 양파는 아기자기한 식감을 줬다. 갈아 올린 분홍 통후추는 화려한 색감만큼 아릿하지만 달콤한 맛으로 음식의 완성도를 높였다.
버터와 크림, 사프란을 하나로 버무려 마침내 스스로 빛나는 이 파스타를 보면서 예전 홀로 걸었던 서울의 길이 떠올랐다. 스무 살, 모든 것이 새롭고 그만큼 두렵던 시절이었다. 연말 반짝이는 네온사인에 괜히 외로움을 느끼며 타지 생활을 시작했다. 그때 보았던 찬란한 빛이 하얀 접시에 얌전히 올라와 모여 있는 것 같았다.
#록키: 뢰스티 1만5000원, 페퍼크림 스테이크 파스타 2만8000원.
#끌림 이탈리아: 스피니치 크림 라비올리 1만6000원, 트러플 버섯크림 빠빠르델레 1만6000원.
#오스테리아 소띠: 라자냐 2만6000원, 사프란 뵈르블랑 2만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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