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 만든다던 청와대 영빈관… 만찬장 찾아 삼만리 끝에 제자리?
청와대로 돌아간 이유
“결국 청와대 영빈관이네요.”
윤석열 대통령이 열흘 새 5번이나 청와대를 찾았다. 지난 5일 첫 국빈인 응우옌쑤언푹 베트남 국가주석의 환영 만찬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연 것이 시작이다. 윤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일반에 개방된 청와대 시설을 대통령실 행사에 처음 활용했다. 이후 6일 청와대 상춘재(常春齋)에서 푹 주석과 차담을 했고, 8일 카타르 월드컵 축구 국가대표팀을 영빈관으로 초대해 환영 만찬을 열었다. 9일에는 상춘재에서 경제단체장들과 비공개 만찬을 했고, 15일에는 영빈관에서 국민 패널 100명을 초청해 제1차 국정과제 점검회의를 주재했다. 앞으로 국빈 만찬뿐 아니라 연회, 대통령 주재 회의 등 공식 행사장으로 청와대 시설을 자주 쓰겠다는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문화계에선 “지난 5월 취임 직후 청와대를 전면 개방한 대통령실이 그동안 외빈 방한 때마다 ‘만찬장 찾아 삼만리’를 해왔는데, 결국 국격에 맞는 행사장으로 청와대 영빈관만 한 공간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라며 “대책도 없이 나온 건 아쉽지만 이제라도 실용주의를 택해서 다행”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대통령실 이재명 부대변인은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고 공간을 실용적으로 재활용하는 차원에서 앞으로도 관람객 불편을 최소화하는 범위에서 청와대 장소를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하려다 막판 바꿔
‘용산 시대’가 시작된 이후 대통령실은 청와대 영빈관을 대체할 다른 장소를 물색해왔다. 지난 5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방한 만찬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렸고, 다른 내외빈 행사는 국방컨벤션센터, 용산 대통령실, 호텔 등에서 이뤄졌다. 외교부에 따르면,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총리급 이상 외빈 방한은 총 10건. 공식 오·만찬은 용산 대통령실에서 가장 많이 열렸고, 서울 콘래드호텔, 총리 공관 등을 떠돌며 진행됐다. 모하메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는 한남동 대통령 관저 첫 손님으로 초청해 예우했다.
대통령실은 첫 국빈인 푹 베트남 주석 만찬을 바이든 미국 대통령 환영 만찬에 이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진행할 계획이었다. 중앙박물관은 지난달 25일 홈페이지에 “12월 5일 국가 중요 행사로 인해 기획전시실을 제외한 모든 시설을 임시 휴관할 예정”이라는 공지를 띄웠으나, 이달 1일 재공지를 내고 “휴관 없이 정상 운영하게 됐다”고 알렸다. 오락가락 공지 소동에 대해 중앙박물관 관계자는 “대통령실에서 ‘국빈을 예우할 만찬 장소를 아무리 찾아도 마땅치 않다’고 양해를 구해왔다. 지난번 바이든 대통령 만찬 때 사흘 전 갑자기 휴관 공지를 띄워서 관람객 불편을 끼쳤으니, 굳이 박물관 으뜸홀을 만찬 장소로 써야 한다면 공지라도 빨리 하자고 했던 것”이라며 “그러다 막판에 만찬 장소가 변경됐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원로 문화계 인사 A씨는 “바이든 만찬 때도 ‘왜 멀쩡한 청와대 영빈관 놔두고 박물관에서 밥을 먹느냐’는 비판이 상당했기 때문에 대통령실에서 부담이 컸을 것”이라며 “국빈 방문 때마다 박물관을 휴관하고 만찬하는 게 관례가 될까 봐 우려했는데, 이제라도 대통령실이 합리적인 결정을 내려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손님 맞이, 영빈관만 한 곳 없어
그럼에도 청와대 영빈관을 사용한 건 뜻밖이라는 반응이 많다. 앞서 지난 3월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 이전을 발표하면서 “국빈 만찬 등에 청와대 영빈관을 사용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국민에게 개방한 청와대 시설을 다시 사용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장소를 바꿔가면서 외빈 만찬을 진행했던 것. 국격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자 대통령실은 지난 9월 영빈관을 대체할 외빈 접견 시설 신축 예산 878억원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야권에서 청와대 이전 비용 논란이 이어지자 윤 대통령이 전면 철회를 지시하면서 무산됐다.
청와대 영빈관은 손님맞이를 위해 설계한 2층 구조의 석조 건물이다. 1978년 박정희 정부 때 건립돼 낡았지만, 전임 정부 때 수리돼 시설이 많이 개선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내부 홀 규모는 면적 496㎡에 층고 10m. 대통령실 관계자는 “국격에 걸맞은 대규모 내외빈 행사 시 최적의 장소를 찾는 노력의 일환으로 청와대 영빈관을 활용하기로 결정했다”며 “푹 주석 국빈 방문 때 처음 사용하면서 행사가 매우 원활하게 진행됐고 국빈도 만족했다”고 전했다.
◇미술관 만든다는 계획은 취소?
그렇다면 청와대 본관, 영빈관 등 주요 건물을 전시장으로 활용하겠다는 방안은 전면 취소되는 걸까.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지난 7월 청와대 활용 계획을 발표하면서 “본관과 관저 등은 상설 미술 전시장으로, 영빈관은 기획전시장으로 바꾸겠다”며 “특히 영빈관은 면적이 넓고 층고가 높아 프리미엄 근현대 미술품 전시에 최적의 공간이다. 영빈관에서는 609점의 청와대 소장품으로 구성한 기획전을 비롯해 ‘이건희 컬렉션’ 등 국내외 최고 작품을 유치해 전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발표 직후부터 문화계·학계에선 “애초 미술관 용도로 건축되지 않은 공간을 전시장으로 활용하려면 항온·항습 기능을 갖추고 별도 조명을 설치하는 등 내부 변경이 불가피해 청와대 원형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는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건축학계 전문가 B씨는 “대통령실이 앞으로 청와대 영빈관을 만찬 등 행사 장소로 활용하겠다고 밝힌 이상, 영빈관을 근현대 미술품 전시장으로 만든다는 문체부 계획은 이미 엇나간 것 아니겠냐”며 “애당초 박보균 장관이 민간 전문가들과 논의 없이 성급하게 활용안을 발표하는 바람에 일을 키웠다”고 지적했다.
지난 5월 청와대 개방 후 12일 현재까지 청와대를 찾은 관람객은 272만명. 지난 6월 문화재청 청와대국민개방추진단이 만 15세 이상 관람객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관람객의 89.1%가 ‘만족한다’고 답했다. 청와대 활용에 대해서는 ‘원형을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이 40.9%로 가장 많았고, 청와대 일대를 근대역사문화공간으로 조성해야 한다는 답변이 22.4%, 박물관·전시관 등 새로운 문화예술공간으로 활용하는 방안이 15.2%로 이어졌다.
◇조만간 진전된 활용 방안 나올 듯
문체부 관계자는 “보다 진전된 청와대 보존과 활용안을 마련하기 위해 현재 다각도로 논의 중”이라고 했다. 대통령실이 지난 7월 발족한 ‘청와대 관리·활용 자문단’은 수차례 회의 결과와 현장 검증, 국민 의견을 토대로 연말까지 로드맵을 마련할 계획이다. 자문단은 이배용 전 이화여대 총장을 단장으로 역사·문화·예술·콘텐츠·관광·조경·건축 등 전문가 15명으로 구성됐다. 자문단 내부 회의에서는 “청와대는 고려 남경 궁터로 시작해 조선시대 ‘경복궁 후원’이었던 역사를 품은 곳이자 광복 이후 격동의 한국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현장인 만큼 본관·관저·영빈관 등 주요 건물은 내부 공사나 리모델링 없이 최대한 원형을 보존하면서 활용해야 한다”는 쪽으로 논의가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 관계자는 “청와대 건물 중에도 경중이 있으니 보존할 것은 보존하고, 춘추관 같은 건물이나 녹지원 등 야외 공간을 활용하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힐 것 같다”며 “문체부가 애초 발표한 것처럼 주요 건물을 미술관으로 만드는 일은 없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문화재청이 발주하고 한국건축역사학회가 진행한 ‘경복궁 후원 기초조사 연구용역’도 연말까지 마무리될 예정이다.
일각에선 영빈관을 행사장으로 너무 자주 사용하면 “청와대를 국민에게 돌려준다”는 취지가 무색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백현민 문화재청 청와대국민개방추진단 사무관은 “영빈관 내부 관람만 제한하고 나머지 시설은 평소처럼 둘러볼 수 있다. 영빈관도 처음 5일 국빈 만찬 때는 사흘 전부터 관람을 제한하고 준비했지만, 이후 행사 때는 당일만 관람을 막고 다음 날 바로 개방하는 식으로 관람객 불편을 최소화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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