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윤관 대법원장이 남긴 것

김황식 전 국무총리 2022. 12. 17.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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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황식의 풍경이 있는 세상]
일러스트=김영석

얼마 전 윤관 대법원장님이 작고하셨습니다.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겠다는 생각을 늘 하면서도 코로나 사태 등을 핑계로 미루고 있던 차에 부음을 듣고 보니, 저의 게으름과 어리석음이 원망스러워졌습니다.

대법원장님은 참 소탈하고 따뜻한 분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가슴속에는 나라와 법원을 사랑하는 열정이 넘치는 분이었습니다. 저의 총리 재직 초기에 어느 기자가 저에게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같다고 하여, 열심히 일해야 할 총리에게는 결코 칭찬만은 아니라는 생각에 “그렇게 보일지 모르지만 내 마음속에는 마그마가 끓고 있어 나는 ‘눈 덮인 휴화산(休火山)’ 같은 사람”이라고 웃으며 대꾸하였는데, 생각해보니 윤관 대법원장님이 꼭 그러한 분이었습니다.

대법원장님은 법관 생활을 광주지방법원에서 시작하여 주로 그 지역에서 근무하였습니다. 이른바 향판(鄕判)이었습니다. 당시 법관의 대종을 이루는 서울대학교 출신도 아니었습니다. 속된 말로 주류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당시 대법원장님은 지방에서 성실하게 묵묵히 일하는 향판 몇 사람을 발탁하여 서울민사지방법원 부장판사 등으로 불러 올리는 파격적 인사를 단행하였습니다. 윤관 대법원장님은 그런 경위로 서울로 올라오셨습니다.

당사자나 변호인의 말을 자르지 않고 경청하며 법정을 온화하게 운영하는 대법원장님의 재판 스타일이 법조 주변에 칭송과 함께 알려졌습니다. 당연히 고등법원 부장판사, 법원장을 거쳐 대법관으로 승진하셨습니다. 더하여 영남 출신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아무런 연고나 개인적 인연이 없는 호남 출신 윤관 대법관을 대법원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오로지 인품, 실력, 그리고 법조계의 평판만이 임명 근거였습니다.

대법원장님은 취임하자마자 사법제도발전위원회를 구성하여 국민을 위한 사법 개혁에 나섰습니다. 법관, 검사, 변호사 등 법조인과 언론인, 학자 등 비법조인을 망라하여 위원회를 구성하고 현승종 전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모셔 무게감을 더했습니다. 사안에 따라서는 검찰이나 변호사의 저항이 있을 수 있으므로 이를 누르고 국민을 위한 제대로 된 사법 개혁을 이루기 위한, 다분히 정략적(?) 구성이었습니다. 저도 법원 출신 3인의 위원 중 한 명으로 참여하였습니다.

그 성과는 실로 대단하였습니다. 시·군 법원과 행정법원, 특허법원 등 전문법원을 설치하여 국민에 대한 사법 서비스를 강화하는 등 다양한 개혁을 이루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개혁은 ‘구속 전 피의자 심문제도’, 속칭 ‘영장실질심사제’의 도입입니다. 이전에는 피의자를 구속하기 위한 영장을 판사가 피의자를 대면하지 않고 서류만을 검토하여 발부 여부를 결정하였습니다. 사람을 구속하는 것처럼 중요한 재판은 없습니다. 그런데 피의자가 판사를 대면하여 하고 싶은 말을 할 기회도 갖지 못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피의자가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한 반드시 판사를 대면하여 변소할 기회를 주자는 것이 이 제도입니다.

그런데 이 제도의 도입에 대하여 검찰은 한사코 반대하였습니다. 격론이 벌어졌습니다. 비법조인 위원들의 의견에 의하여 제도 도입 여부가 판가름 날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피의자도 피의자이지만 법관으로서도 피의자를 만나 물어보고 확인하고 싶은 사항이 있는 경우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발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라며 다소 감성적 표현으로 도입의 필요성을 주장하였습니다. 대법원장님과 뜻을 같이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도입된 영장실질심사제도와 그 후 최종영 대법원장과 이용훈 대법원장 시기를 거치며 정착된 공판중심주의가 우리나라 형사사법제도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결국 윤관 대법원장님의 업적과 그에 따라 국민이 받은 혜택은, 내 편 네 편을 가르지 않고 합리적 인사로 훌륭한 법관을 발탁한 대법원장님들과 사심 없이 훌륭한 분을 대법원장으로 임명한 대통령의 덕택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인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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