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커 혼란 주려 ‘개다리 춤’도? 브라질도 무너뜨린 골키퍼의 세계
[배준용 기자의 월드컵 톡톡]
카타르 월드컵이 한 달여간의 대장정 끝에 어느덧 결승전을 앞두고 있습니다. 16강 때 잠잠했던 이변은 8강부터 다시 속출하고 있으니, 역대급 월드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이런 이변의 중심에는 엄청난 선방을 보여준 골키퍼들이 있었죠.
모로코의 키퍼 야신 부누(31)가 가장 먼저 돋보였습니다. 야신 부누는 조별 경기부터 8강전까지 총 5경기 동안 단 1실점, 그마저도 자책골일 정도로 눈부신 방어를 보여줬습니다. 16강에서 만난 스페인과의 승부차기에서는 2번의 세이브로 ‘무적 함대’ 스페인을 격침시켰습니다. 8강에서 만난 우승후보 포르투갈도 야신 부누가 지키는 모로코 골문을 열지 못했습니다. 과거 야신상으로 불렸던 골든글러브의 유력한 수상 후보로도 꼽힙니다. 공교롭게도 구소련의 전설적인 키퍼 레프 야신(Lev Yashin)의 성과 비슷한 야신(Yassine)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어, 국내 팬들에게는 ‘모로코의 야신’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크로아티아의 이변에는 27세의 젊은 키퍼 도미니크 리바코비치가 있었습니다. 특히 8강에서 만난 ‘우승 후보 1순위’ 브라질을 상대로 리바코비치는 11개의 유효슈팅 중 단 1골만 허용했고, 승부차기에서도 두 차례 세이브로 대이변의 주역이 됐지요. 브라질은 독일과 함께 승부차기에 강한 나라로 평가받지만, 리바코비치의 눈부신 선방을 뚫어내지 못하고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습니다. 리바코비치는 현재 독일 최고 명문 구단인 바이에른 뮌헨이 영입을 노리고 있다고 하네요.
진영의 최후방에 있는 골키퍼는 공격수보다 주목을 적게 받지만, 그 전술적 가치는 대단합니다. 골문을 지키는 골키퍼가 흔들리면 덩달아 수비도 흔들립니다. 수비가 흔들리면 팀 전체가 적극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데 부담을 느낍니다. 자연히 수비진-미드필더-공격수 간 간격이 멀어지고, 상대 팀에게 많은 공간을 내주면서 체력적으로 힘든 경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명감독들이 새로 팀을 정비할 때 실력이 뛰어난 골키퍼를 가장 먼저 찾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2002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이 4강을 달성한 것도 이운재라는 뛰어난 키퍼가 뒤에서 든든히 버텨준 공로를 절대 빼놓을 수 없습니다.
특히 월드컵 같은 토너먼트 대회에서는 승부차기가 있기 때문에 그 가치가 2~3배 더 중요해집니다. 페널티킥과 승부차기의 경우 골키퍼는 키커가 골을 찬 직후에야 골라인 밖으로 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가 어느 방향으로 찰지 예상하고 미리 몸을 날려야만 물리적으로 슈팅을 막을 수 있죠. 키퍼들은 키커가 공을 차기 전 골문의 어느 방향을 보는지, 공을 차기 직전 찰나의 순간에 키커의 발목 각도를 보고 방향을 예측하기도 합니다. 키커도 이를 알고 일부러 반대 방향으로 시선을 두거나, 발목을 마지막에 빠르게 꺾어 역으로 심리전을 걸기도 하지요.
키커와 골키퍼의 심리전은 갈수록 고도화되고 있습니다. 골키퍼가 미리 손가락으로 골문의 한 방향을 가리켜 키커에게 심리적 부담을 주기도 합니다. 야신 부누처럼 키커가 공을 차기 전 무릎을 양쪽으로 번갈아 굽히는, 마치 개다리 춤을 추는 동작으로 자신이 뛰는 방향을 예측하지 못하게 만들어 키커를 당황시키기도 합니다. 페널티킥과 승부차기를 위한 철저한 준비도 필수입니다. 키퍼는 상대 팀 선수가 페널티킥을 주로 어느 방향으로 차는지 줄줄이 암기하거나, 자신의 물통에 상대 팀 키커의 페널티킥 습관을 그림으로 그려 붙인 뒤 물을 마시는 척하며 커닝(?)하는 경우도 있죠.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8강 경기에서 잉글랜드의 스트라이커 해리 케인이 두 번째 페널티킥을 실축한 것은 실력 부족이나 불운으로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프랑스의 주전 골키퍼인 위고 요리스(36)는 프랑스 축구 사상 가장 많은 A매치(143경기)를 소화한 최고 골키퍼이지만, 유독 페널티킥을 지독하게 못 막는 키퍼로도 유명한데요. 공교롭게도 요리스가 손흥민, 케인과 함께 오랜 기간 토트넘 홋스퍼에서 함께해온 동료란 점이 케인에겐 큰 심리적 부담으로 작용했습니다. 훈련장에서 매일 슈팅을 하고 막는 사이이다 보니, 페널티킥 잘 차기로 유명한 케인이라도 자신의 습관을 줄줄이 꿰고 있는 요리스를 상대로 2번의 대결을 벌이는 건 큰 부담일 수밖에 없었죠. 경기 후 외신들도 “요리스를 상대로 케인에게 2번의 페널티킥을 차도록 한 것은 너무 잔인한 결정이었다”고 지적했습니다.
최근에는 축구 전술이 고도화되면서 골키퍼에게 요구되는 능력도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골문 주변을 지키며 슈팅을 막는 데 주력했지만, 최근에는 아군 수비진이 상대 진영으로 높이 올라갈 경우 골키퍼도 이에 맞춰 골문을 비우고 앞으로 나와 최종 수비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과거에는 골라인 아웃이 되면 골키퍼가 길게 골킥을 차는 게 보통이었지만, 최근에는 긴 골킥이 상대에게 공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인식 때문에 골키퍼와 수비수들이 짧게 패스를 주고받는 빌드업으로 공격을 전개하는 게 보통입니다. 이렇다 보니 골키퍼들은 뛰어난 선방 능력에 수비수에게 요구되는 스피드와 볼 간수 능력, 패스 능력까지 두루 갖춰야만 하는 실정입니다. 브라질의 알리송 페케르, 독일의 마누엘 노이어 등 세계 최고의 골키퍼들은 이런 능력들을 두루 갖추고 있지요.
지난 월드컵에서 맹활약했던 조현우 키퍼가 이번 월드컵에서 김승규 키퍼에게 주전 자리를 내준 것도 빌드업 능력 때문입니다. 뛰어난 선방 능력을 갖췄음에도 빌드업 때 볼을 간수하고 안정적으로 패스하는 능력이 김승규 키퍼보다 부족했기 때문에, 빌드업을 중시하는 벤투 감독으로선 김승규를 주전으로 쓸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축구 팬들 사이에선 “조현우의 세이브 능력을 보고 싶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습니다. “한국 축구가 월드컵에서 더 성공하려면 선방 능력과 빌드업, 수비 능력을 두루 갖춘 월드클래스 골키퍼를 배출해야 한다”는 축구 전문가들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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