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의 끝을 봤다” 15년 노동 운동가는 왜 진보에 등 돌렸나
[배준용 기자의 디코딩]
노동운동 전략가 한지원이 본
민주노총과 진보정치의 민낯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이하 화물연대)가 안전운임제 영구 시행을 주장하며 시작한 총파업이 지난 9일 막을 내렸다. 16일간 이어진 파업으로 레미콘 타설 공사가 중단되고 주유소엔 기름이 동났다. 석유화학, 자동차, 철강 등도 줄줄이 피해를 입는 가운데,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노조원에게 욕설을 쓴 현수막이 걸리고 차량에 쇠구슬을 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가 “불법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며 업무개시명령 발동 등 강경 대응에 나서고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여론이 악화하자 결국 파업을 철회했다. “정부가 법과 원칙을 지켜 불법 파업을 막아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나왔다.
2012년부터 화물연대의 자문에 응했던 노동운동가 출신 정치·경제 평론가 한지원(45)씨는 이번 사태에 대해 “민주당이 차린 무대에서 윤석열 정부와 화물연대가 비극을 벌인 것”이라고 평가했다. 문재인 정부가 안전운임제를 도입할 때 정교하고 과학적으로 설계하지 않은 데다 이를 방치했고, 여기에 고유가·고물가가 맞물리면서 윤석열 정부와 민주노총이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한씨는 호주에서 먼저 운영된 안전운임제라는 개념을 국내에 소개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15년 동안 ‘사회진보연대’에서 활동하다 2021년 돌연 노동운동을 멈췄다. 그 후 어떤 학자, 평론가보다 문재인 정부와 진보 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논객이 됐다. 그는 “포퓰리즘의 끝을 보여준 문재인 정부를 보며 청춘을 다 쏟아부은 진보 정치와 노동운동에 느꼈던 의구심이 환멸로 바뀌었다”고 했다.
대선을 코앞에 둔 지난 3월엔 ‘대통령의 숙제’란 책을 내고 문 정부와 진보의 포퓰리즘을 비판했다. 문 전 대통령을 “포퓰리즘의 끝판왕”이라고 평가한 그는 “지금은 야만과 문명, 포퓰리즘과 자유주의의 대결”이라며 “포퓰리즘을 막기 위한 제2의 국공합작, 반포퓰리즘 연대를 이루기 위해 노동운동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최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만난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박근혜 탄핵을 외친 광화문 촛불 시위가 내가 진보를 떠나게 된 계기가 됐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한때 ‘동지’였던 민주노총에 대해서는 “스스로 기득권임을 깨닫지 못하면 변하지 못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고민 없이 안전운임제 도입한 게 화근”
-화물연대 파업의 쟁점이었던 ‘안전운임제’가 무엇인가?
“화물차 운전자의 근로 여건을 개선하고 운행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최소한의 운임을 보장하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화주와 운송회사 간에 물량을 넘기고 재차 넘기는 과정에서 운송회사는 수수료를 챙기고, 화물차 운전자는 제대로 대가를 받지 못하는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는 얘기가 계속 나왔다. 운임이 낮다보니 물량을 많이 나르면서 화물차 사고가 잦아지는 문제도 있었다. 그래서 일종의 최저임금처럼 화물차 운전자에게 최소 운임을 보장하면 화물 물량이 과도하게 재하청되는 걸 막을 수 있고, 운전자가 무리하게 많은 화물을 운송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차원에서 고안된 것이다.”
-화물연대는 안전운임제를 영구적으로 시행하라고 주장했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2018년 국회에서 개정안을 통과시켜 2020년부터 3년 일몰제로 안전운임제를 도입했다. 안전운임제도 최저임금처럼 급격하게 오르게 되면 물류 비용이 급상승하면서 소비자 물가에도 부정적인 효과가 나타난다. 그래서 도입할 때 안전운임을 어떻게 결정할 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기준과 방식을 정해서 도입했어야 했는데, 문 정부가 이런 고민없이 성급하게 도입해버렸다.”
-민주당은 “파업 전까지 윤석열 정부가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문 정부와 민주당이 3년 일몰제로 도입해놓고 제도를 정비했어야 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 고유가, 고물가가 되면서 갑자기 안전운임을 20~30% 올려야 하는, 잠재된 위험이 터진 것이다.”
-안전운임제를 포퓰리즘적으로 도입했다는 건가.
“그래서 ‘민주당이 깔아놓은 무대에 윤석열 정부와 화물 연대가 비극을 벌인 형국’이라고 한 것이다. 애초에 문 정부도 안전운임제를 잘 운영할 자신이 없었던 거라고 본다. 최저임금 인상처럼 노동계가 강력하게 요구하니 엉성하게 들어준 셈이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인가.
“현재는 운송회사, 화주, 정부, 화물연대 4자간 교섭으로 안전운임을 결정하게 돼 있는데, 운임을 정하는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이 부실하다. 단적인 예로 안전운임이 적용되는 화물차(컨테이너, BCT)의 사고 통계조차 없다. 국토교통부가 언론사에 뿌린 자료는 단순한 화물차 사고 통계다. 비교 근거로 사용하기 어렵다. 안전운임이 적용되는 화물차들을 표본 조사해서 효과에 대한 정확한 분석도 했어야 했는데 그런 게 없다. 고물가, 고금리 상황에서의 안전운임제가 물가와 국가 경제에 미칠 영향에 대한 개선책 같은 대안도 마련했어야 했다.”
-화물연대에 대한 비판이 컸는데.
“화물연대의 요구는 고물가, 고유가 상황에서 물가 상승을 가속시킬 수 있었다. 국민 경제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이번 파업으로 화물연대가 안전운임제를 교섭할 주체로서의 신뢰성을 잃었다. 이번 파업으로 ‘화물 연대는 수틀리면 판을 없고 파업할 것’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그래서 산별교섭이나 중앙 교섭이 잘 돼 있는 나라들은 파업에 굉장히 신중하다. 그런데 이번 파업으로 교섭과 타협의 제도를 만들기 어려워졌고 정부와 노동계간 힘 싸움이 되어버렸다.”
-윤석열 정부의 단호한 대응에 긍정적 평가가 나왔다.
“윤석열 정부의 대응에도 문제가 많았다. 지난 6월에 파업을 했는데 5개월간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다 재파업이 임박하자 3년 연장을 제시한 것 아닌가. 5개월 새 안전운임제를 정비할 것인지, 없앤다면 어떤 보조적인 정책을 할 지 대안을 마련했어야 했다. 그런데 별 대책 없다가 파업이 시작되자 ‘법과 원칙’을 내세웠다. 업무개시명령까지 간 것도 두고두고 흠이 될 것이다. 무대책과 법과 원칙이 결합했는데, 이런 방식을 반복하면 노동개혁도 어렵다. 노동개혁은 결국 정부가 국민과 노동계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정치적 과정인데, 지금처럼 법과 원칙만 강조하면 노동계는 ‘괜히 협상에 응했다가 버티면 두들겨 맞겠구나’란 생각을 하게 된다. 선진국 노동개혁의 공통점은 고도의 정치적 협상과 노동이 참여할 수 있는 유인이 영리하게 설계됐다는 점이다. 윤 정부는 이 부분을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15년 몸담은 노동운동을 떠나다
서울대 전기공학부 96학번이던 한지원씨가 노동운동에 몸을 담게 된 건 학창시절 우연히 마르크시즘을 접한 것이 시작점이었다. IMF 외환위기로 곳곳에서 벌어진 대량해고와 노동자 대투쟁을 보며 진보 정치와 마르크시즘에 확신을 가지게 됐단다. 굵직굵직한 노동 투쟁 현장에서 구호를 외치고, 노동자들과 머리를 맞대고 고심했다. 그러나 그는 문재인 정권 시절 노동운동계를 떠났다.
-노동운동을 그만둔 이유가 뭔가?
“문재인 정부 전까지만 해도 진보적 정치와 노동운동으로 정치와 사회를 혁신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포퓰리즘의 끝을 보여준 문재인 정부와 그 흐름에 앞장선 정의당과 민주노총을 보면서 한국의 진보정치에 환멸을 느꼈다. 진보 진영 전체가 타락하는 속도는 너무나 빨라졌는데, 소위 운동권으로 불리는 사회 안에는 이 사태를 인식하는 사람조차 드물었다. ‘이러다 한국 사회가 큰일 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진보와 보수보다 저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반(反) 포퓰리즘 연합을 만드는 게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지난 대선에선 ‘이재명 당선만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 이재명 후보는 안 된다고 생각했나.
“이재명 대표는 포퓰리스트로서 위험한 걸 다 갖춘 종합형이다. 각종 부패에 연루된데다 굉장한 국가주의자다. ‘다운그레이드 된 문재인’이라고 할까. 예를 들어 이재명 대표가 대선 때 기본 소득을 자주 말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대표가 기본소득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고 본다. 기본 소득은 원래 노동시장의 참여를 줄여 완전 고용 시장을 이루겠다는 개념이다. 그러려면 노동시장에 참여한 사람들의 생산성이 지금보다 훨씬 더 빨리 올라가야 한다. 그게 안되면 국가 재정이 박살나는 거다. 소득주도성장보다 더 극악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이 대표가 이런 것까지 생각했을지 의문이다.”
-마르크시즘에 빠진 계기가 있었나?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큰 고생 없이 자랐다. 마르크시즘에 빠진 건 순수하게 학문적 호기심이었다. 서울대 동아리 중에 통합과학연구회라는 사회과학 동아리에서 맑시즘을 접했는데, 그 세계관이 멋지다고 느꼈다. ‘그래, 세상은 이렇게 좀 복잡해야 제 맛이지’라는 생각? 그렇게 자연히 학생 운동과도 가까워졌다. 사실 그때만 해도 이미 소련도 망하고 사회주의는 유행에 뒤처지는 시대였는데, 3학년 때 IMF 외환위기가 터지니 마르크스의 분석과 대책이 더 체감됐다. 정리해고 바람이 불고 노동자들의 대투쟁도 경험하면서 나에겐 마르크시즘이 더 현실로 다가왔다.
-대학때부터 노동운동에 몸을 담게 된 건가?
“그렇진 않다. 졸업 전 취업해 회사 생활을 3년 정도 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신자유주의 바람이 불자 그로 인한 고통과 불평등이 점점 커진다는 생각에 ‘내가 이렇게 직장 생활만 하며 사는 게 맞나?’ 하며 사회진보연대에 들어가게 됐다.
-주로 어떤 일을 했나.
“기업 회계를 자주 봤다. 2008년에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무너지는 기업이 상당히 많았다. 노동자들 입장에선 재무제표를 보고 산업적 함의나 국민 경제적 함의를 바로 파악하기 어려우니까 재무제표로 기업 상황을 분석해서 해고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방어 논리를 만들어주는 일을 했다. 지금 와서 반성하자면 ‘노동자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약자’라는 생각에 좀 억지스러운 논리를 만들기도 했다(웃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2018년 한국 GM이 군산 공장을 폐쇄한 이른바 한국 GM 사태다. 노조의 파업과 글로벌 GM의 전략 변화가 맞물리면서 군산 공장이 완전히 폐쇄됐다. 자본이 회사를 버리기 시작하면 노동자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이 던져진 상황이었다. 그런데 당시 노조가 선택한 방식은 각자도생이었다. 구조조정 반대 슬로건만 내걸고 사태가 극한으로 치닫도록 방치했다. 떠나야 하는 사람들은 결국 떨어져나가란 의미였다.조합원이 줄어야 내 기존 임금과 고용이 보장된다는 걸 알았던 거다.”
-어떻게 대응했어야 했나?
“노동자들이 노동시간을 줄이고 일자리 나누기를 하면서 해결책이 나올 때까지 함께 사는 방식이 맞는다고 봤다. 그렇게 제안하니 노조에선 ‘일자리 나누기를 하면 회사 측의 구조조정을 인정하는 것’이라며 반대하더라. 공장 폐쇄를 인정할 수 없으니 노동자도 그냥 방치하겠다는 방식을 택한 거다. 정부의 개입을 요구하고, 그 사이에 누군가는 그 피해를 안고 정리가 되도록 했다. ‘세금으로 민간 기업 지원하는 걸 국민들이 동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당신들이라면 증세해서 다른 공장 사자고 하면 세금 낼 거냐’고 했다. 돌이켜보면 그런 경험들이 쌓이면서 노동운동에서 멀어지게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민주노총과도 가까웠을 텐데, 문제제기는 없었나?
“민주노총이 투쟁만 할 게 아니라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를 만드는 역할, 성숙한 교섭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문제제기를 많이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더라. 해고나 구조조정을 두고 1년 내내, 해마다 똑같은 일들이 반복됐다. 계속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있고, 그 와중에 자기 권리를 지키는 사람들도 있고…. 아비규환이 반복됐다. 그럴 때마다 비정규직은 더 많이 다치더라.”
-민주노총에 대한 비판과 국민적 반감이 나날이 커지고 있다.
“1970~80년대까지 노동운동은 정말 가난한 노동자들의 싸움이었다. 그런데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노동자 대투쟁의 결과로 민주노총이 등장했다. 노동운동이 대기업을 중심으로 시작된 것이다. 여기서 기업별 노조가 산별 노조로 확대되어서 임금과 노동 기준의 산업별 스탠더드가 형성되는 방향으로 갔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노태우 정부도, 기업도, 심지어 대기업 노동자들도 이걸 바라지 않았다. 특히 대기업 쪽에서는 임금이 대폭 오르니 ‘중소기업은 이걸 따라오기 어렵다’는 생각들을 했다. 이미 1990년대 초반에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임금격차가 크게 벌어졌고, 호봉제가 맞물리면서 격차가 점점 더 커졌다. 그러다 3저 호황이 끝나고 IMF 외환위기도 터지면서 중소기업들은 줄줄이 망한 반면 대기업은 건재했다. 이렇게 한국의 원하청 시스템과 정규직-비정규직 체계, 노조의 격차가 임금 격차로 굳어지는 상황이 됐다. 중소기업 생태계가 점점 쑥대밭이 되는 가운데에서도 대기업 노조는 권리를 꿋꿋이 지켜왔으니,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결국 민주노총은 기득권으로 봐야 할까.
“IMF 정리해고 여파 속에서도 대기업에서는 식당 노동자 같은 약자부터 잘려나갔다. 노동시장 유연화나 비정규직 확대도 중소기업이나 소규모 자영업에서 자체적으로 일어난 일들이다. 민주노총이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말해왔지만, 비정규직 문제를 위해 총파업을 하지는 못한다. 이들이 적극 나서는 비정규직 투쟁도 사용자가 정부이거나 대기업인 경우다. 민주화 전에 군인과 대기업이 쥐고 있던 기득권이 민주화 이후에는 민주노총이 야당 정치권과 함께 기득권 동맹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이걸 인정하지 않으면 변할 수가 없다.”
◇ “포퓰리즘, 문제 원인 가리고 책임 회피만”
한지원은 자신의 책 ‘대통령의 숙제’에서 “1인당 GDP 3만 달러에 이른 한국도 중대한 기로에 놓여 있다”고 경고했다. 1인당 GDP 3만 달러에 이른 후 많은 선진국들이 위기와 추락을 겪었는데, 한국 역시 정치적 포퓰리즘이 점점 득세하면서 언제든 추락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 정치의 혼란에 대해선 “보수와 진보 모두 타락한 결과”라며 “합리적인 세계관으로 정치 엘리트들이 새롭게 거듭나야 대한민국의 추락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책에서 문재인 정부와 진보 정치, 민주노총이 포퓰리즘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는데.
“포퓰리즘의 가장 큰 문제는 기득권의 이해관계나 사회적 문제의 근본적 원인을 드러내기보다는 특정한 집단을 악마화하면서 책임을 전가해 문제를 덮고, 분노를 선동해 정치적 집권에 이용하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집권한 이유는 박근혜 정부의 국정 농단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국정 농단의 원인인 제왕적 대통령제와 권력 남용의 문제를 개선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문 정부는 제왕적 대통령은 그대로 두고 ‘민주주의’와 ‘여론’을 앞세워 정적 청산에 열을 올렸다. 열성 지지자들 동원해 언론도 공격하고, 공수처를 만들고 법무부 장관이 수사 지휘를 남발했다. 불만을 동원했지만 그 불만의 원인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걸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아서 정치적 이익을 챙기는 데 골몰했다. 역대 어느 정부도 이 정도까지 노골적으로 하지는 않았다.”
-문 정부의 여러 정책이 논란이 됐다.
“경제학에 반하는 최저임금 인상, 또 반일 캠페인을 보면서 ‘진보라는 진영이 포퓰리즘 친화적 태도를 계속해서 키워왔고, 야당일 때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운동권들이 권력을 잡고 청와대에 들어가니까 정말 괴물이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포퓰리즘의 대표적 특징으로 ‘반과학’과 ‘반경제학’을 꼽았다.
“경제학은 제한된 재화를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를 다루는데, 포퓰리즘은 이걸 정치적 의지로 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이 체화된 것이 바로 문재인 대통령이다. 문재인 정부가 임기 초반 2년간 최저임금을 29%나 올렸다. 그런데 임기 전체 인상률은 평균 7.3%로 도리어 박근혜 정부(7.4%)보다 낮다. 이유는 임기 후반 3년에는 인상률을 3%로 급격히 낮췄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철저히 여론 지지율에 따라 인상률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2017년과 2018년에는 최저 임금 인상에 대해 긍정 여론이 높았지만, 2019년부터는 동결 의견이 더 높았다. 자신들이 내세운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신념이 아니라, 여론 추이에 따라 결정했을 뿐이다. ‘여론이 곧 민주주의, 여론이 과학적 진리보다 우위에 있다’고 믿는 전형적인 포퓰리즘적 신념이다. 사실 문재인 정부가 말한 소득주도성장은 여론 주도 성장이라고 부르는 게 적당할 거다.”
-진보 진영이 왜 이렇게 포퓰리즘화 됐을까.
“광우병 사태부터 조짐이 있었다. 진보 진영은 과학적 사실과 무관하게 그냥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온 시민들이 더 좋았던 거다. 세월호 때도 갖가지 음모론에 대해 반지성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듣지 않더라. ‘친일 보수를 제거하고 통일을 이루면 민주주의가 완성된다’는 분단체제론적 인식 하에 반과학, 반경제학을 앞세운 포퓰리즘으로 30년간 투쟁하면서 386세력이 대중을 포섭하고 집권까지 하는 데 성공했다. 지금 민주당에 그나마 자유주의 전통을 이어온 DJ 계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다 뿌리가 뽑혔다. 운동권은 피해자의 고통을 극대화하고 대중을 동원하는 데 거의 전문가다. 반대로 사회적 문제의 원인과 해법을 찾아낼 능력은 없다는 점에서 지극히 포퓰리스트에 가깝다. 세월호 사고가 났을 때에도 우리가 어떻게 효율적으로 구조하고 인명 피해를 줄일까에 대한 대안이 나와야 하는데 진보 진영에서 그런 논의와 대책들이 나왔는가.”
-분단체제론도 비판했다.
“분단체제론은 86운동권 세력의 핵심적 역사관이다. 보수가 친일 잔재의 계승자로 분단으로 기득권을 누렸고 독재를 선호하니 이 보수를 청산하고 남북이 통일을 이뤄야 민주주의가 완성된다는, 이른바 ‘토착왜구론’과 궤를 같이한다. 386세대 지식인 주류와 정치권이 이를 수용하고 있는데, 선거 민주주의 기본인 정치적 다원성을 부정하는 반민주주의적 세계관이다. 그래서 늘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 ‘친일파 집권’ ‘군부 독재 정권’으로 몰아세우는데, 반대로 군주정에 가까운 북한과 통일을 해야 하는 모순에 대해선 입을 다문다. 통일의 당위성만 주장하는 것이다.”
-문재인 정권 때 반일주의가 고조된다는 우려가 컸는데.
“일제의 강점은 제국주의의 침탈과 더불어 자주적 근대화에 실패한 조선의 무능이 원인이다. 그런데 분단체제론은 이런 객관적 역사 인식을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도덕적 비난으로 대체하고 식민지 시대를 재해석해 분노 감정을 끊임없이 소환한다. 과거에서 얻어야 할 교훈에 대해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남북 분단도 마찬가지다. 분단의 핵심적 원인은 당시 세계 정세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남북한 지도자들의 잘못된 선택이지, 친일파의 역할은 중요한 변수가 아니었다. 그런데 친일파에 책임을 전가하는 분단 체제론은 1940년대 정치 지도자들의 오류를 은폐한다. 역사를 통해 얻어야 하는 교훈은 반일과 친북이 아닌 세계정세의 변화를 냉정하게 과학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인데, 반대로 문재인 정부는 이런 분단체제론적 인식에 아주 충실했다. 결과적으로 한일 양국 시민 간의 혐오 감정만 키우고 북한은 핵개발을 계속하게 됐다. 문재인 정부의 대일본 외교는 타락한 민주주의가 초래한 잘못된 외교의 전형을 보여준 사례라고 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말기까지 지지율이 높은 편이었다.
“86세대 운동권의 30년 투쟁이 성공한 것이다. 분단체제론적 세계관이 대중에도 뿌리깊게 자리 잡았다. 대통령과 진보 진영의 타락인 동시에 대중의 타락이기도 하다.”
-정의당도 심각한 위기 상황이다.
“정의당이 민주당 2중대를 자처하고 분단 체제론에서 비롯된 포퓰리즘적 세계관을 민주당과 같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당의 강령이 소득주도성장 아닌가. 문재인 정부가 ‘소주성’을 내세우니 자기들이 먼저 했다고 좋아했다. 문재인 정부와 비슷하게 ‘경제학은 없다’고 생각하는 거다.”
-어떻게 해야 하나.
“진보의 재구성이 필요하다. 정의당은 정통적 입장인 반미반일, 반신자유주의 등의 태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오히려 자유의 원칙에 충실한 진보적 한미일동맹, 지속가능한 재정과 공정한 경쟁을 가능케 하는 세계시장 등에 관해 이야기한다면, 대중적 설득력과 함께 주류 정당들에 대해서도 담론적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보수 진영도 점점 포퓰리즘화된다는 우려가 있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도 전형적인 포퓰리즘을 보여줬다고 본다. 남녀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 불만을 빵 터트려서 자신의 정치적인 기반으로 삼지 않았나. 386운동권이 포퓰리즘을 앞세워 집권하는 동안 보수는 혁신을 하지 못하고 계속 타락하고 무능해졌다. 현대화에 실패하고 박정희·이승만 신화에 갇혀있다. 정치가 계속 타락하는 건 진보뿐만 아니라 보수의 정치 엘리트 책임도 크다.”
-보통 좌파들은 반엘리트주의적 성향을 보이던데.
“좌파의 반엘리트주의는 원래 민중이 주체가 되는 변화의 가능성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보면 진보 엘리트의 책임을 면제하는 알리바이로 사용하는 것 같다. 나라가 망하면 그건 무조건 지식 엘리트, 정치 엘리트들의 책임이다. 진보와 보수 모두 이제 합리적이고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를 보고 이념을 재구축해야 한다. 그리고 엘리트의 책무를 인식하고 성숙한 경쟁을 해야한다. 메디슨 프로젝트로 불리는 세계 각국의 경제성장 장기 시계열 자료를 보면, 보통 한 국가는 GDP 1인당 3만달러를 달성하면서 위기에 봉착한다. 미국, 캐나다, 독일은 잠시 주춤하다 성장을 재개한 반면 일본과 이탈리아는 추락했다. 부패와 기존 주류의 몰락, 포퓰리즘 확산을 겪으며 민주주의가 고장나면서 경제 개혁의 타이밍을 놓쳤기 때문이다. 일본은 그나마 정체 상태로 30년을 버텼다. 우리나라도 2010년대에 1인당 3만달러를 달성한 이후 점점 추락하는 모습이다. 이탈리아로 가느냐, 독일로 가느냐의 갈림길에 놓여있다. 한국에서는 일본을 비웃는 사람이 많은데, 정체 상태로 30년을 버틴 건 대단한 것이다. 난 한국이 일본 정도만 되어도 엄청 성공했다고 본다. 한국은 사실 아르헨티나 꼴이 되기 십상인 상황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숙제는 뭐라고 보는가.
“정부가 얼마나 시장 실패에 잘 대처하느냐에 따라 국가 경제의 잠재적 크기가 결정되는데, 그 대처 능력의 토대가 민주주의다. 한국 민주주의가 발전하려면 무능과 권력남용의 문제가 끊임없이 이어진 제왕적 대통령제부터 해소해야 한다. 대통령제가 시효 만료됐다는 점은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바다. 여론 탓, 대선 후보 탓에 지금껏 못했다. 윤 대통령 상황이라면 지금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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