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와 맥주로 시작한 재단사업, 어린이재활병원-청년자립 농장으로 결실”

서영아 기자 2022. 12. 17.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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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아의 100세 카페] 이런 인생 2막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백경학 상임이사가 어린이재활의원을 방문한 6세 어린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다. 서울 종로구 신교동에 위치한 푸르메재단 건물에는 장애인치과와 어린이재활의원, 장애인복지관 등이 들어서 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그의 인생 2막은 유난히 빨리 시작됐다. 30대 후반에 10여 년의 기자 생활을 접고 맥줏집을 내겠다고 나섰다. 어릴 적 꿈이 기자였고 나름 재미있게 일했지만, 큰 사건 하나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1998년 독일 연수 막바지에 영국에서 당한 교통사고로 아내가 중증장애인이 됐다.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59)는 평범한 기자에서 산하기관을 포함해 연간 670억 원의 예산을 다루는 비영리단체의 경영자로 변신했다. 그의 인생 2막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을까. 9일 서울 종로구 신교동 재단사무실을 찾았다.
○ ‘피와 맥주로 세워진’ 재단

사고 직후 아내는 응급수술로 왼쪽 다리를 잘랐지만 염증 때문에 사경을 헤맸다. 최후의 수단으로 두 번 더 절단 수술을 받은 뒤에 의식이 돌아왔다. 이후로도 힘든 치료와 재활훈련이 이어졌다.

3년 반 만에 돌아온 한국은 낯설었다. 장애인이 치료받기도, 생활하기도 너무 힘든 나라였다. 뭐라도 해야만 했다. 부부는 언젠가는 환자가 주인이 되는 작은 재활병원을 만들자는 다짐을 하게 됐다. “당시 집사람이 재활병원에 입원했는데 병원비로 제 월급이 고스란히 들어갔습니다. 병원에 입원한 건데 왜 따로 간병인을 고용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병원은 환자가 아닌 의료진이 주인이더군요. 유럽에서는 의료진이 24시간 환자를 가족처럼 보살폈죠. 더 늦기 전에 유럽 같은 병원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병원을 만들려니 먼저 재단이 필요했고 재단을 만들려면 ‘재산’이 있어야 했다. 마침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주세법이 바뀌면서 소규모 양조가 풀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독일에서 양조학을 전공했던 후배가 떠올랐다. 월드컵 전에 독일식 하우스 맥주를 만들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2001년 말 사표를 내고 이듬해 7월 ‘옥토버훼스트’ 1호점을 강남에 열었다.

2005년 드디어 푸르메재단이 출범했다. 8년에 걸친 소송 끝에 아내의 교통사고 피해보상금을 받았고, 아내는 이 중 절반인 10억7000만 원을 재단에 내놓았다. 여기에 백 씨의 옥토버훼스트 지분 10%가 더해져 재단의 ‘기본 재산’이 되었다. “그래서 저희끼리는 농담 삼아 푸르메를 피와 맥주로 이뤄진 재단이라고 말해요.”(백 씨)
○국내 유일 어린이재활병원


현재 푸르메 소셜팜이 들어선 경기 여주시 오학동 땅을 기증한 이상훈 장춘순 부부. 푸르메재단 제공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죠. 손꼽아 본다면….

“저희가 어린이의료사업을 할 수 있게 해주신 분, 이철재 사장님이 가장 고맙죠. 아무런 조건 없이 도와줬어요. 미국 유학 시절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됐지만 벤처 창업에 성공한 사업가였는데, 먼저 연락을 해오셨어요. 그분은 자신이 가진 회사 주식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10억 원을 마련해 주셨어요. 동아일보에 기사가 났고 그걸 보고 감동한 김정주 NXC(넥슨의 지주회사) 대표가 더 큰 기부를 해주셨고요.”

2월 말 미국에서 유명을 달리한 김정주 대표는 든든한 후원자였다. 2016년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문을 연 국내 최초의 어린이재활병원 건립에 일찌감치 200억 원을 기부해 마중물 역할을 했다. 병원은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이란 이름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그 뒤 병원 건립에는 시민 1만 명, 200개 기업이 정성을 모아줘 2년 만에 나머지 230억 원이 기적같이 모금됐다.

하지만 어린이재활병원은 ‘구조적 적자’라는 숙명을 안고 있었다. 수익을 내려면 비싼 검사와 수술을 많이 해야 하는데 재활병원은 그런 게 있을 수 없다. 유수의 대형 병원들이 재활병원을 운영하지 않는 이유다.

“병원이 자리 잡았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요. 지속 가능해야 하는데 쉽지 않아요. 물리치료와 작업치료는 수가가 굉장히 낮아서, 치료할수록 적자죠.”

푸르메 재활병원은 애초에 연간 30억 원 정도 적자 요인을 안고 있었다. 일부는 서울시와 마포구의 지원을 받고 나머지는 모금 등으로 메우려 했다. 그런데 코로나19 사태로 환자가 크게 줄면서 2020년 53억 원, 2021년 51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지난해 병원 설립 5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김정주 대표에게 긴급 지원을 요청해 도움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어려울 때면 늘 선한 사람들이 나타나 힘을 보태줬지만, 정부나 지자체는 그의 기대와는 딴판이었다. “어린이재활병원은 꼭 필요한 곳이고, 공공이 할 일이다, 우리가 앞장서지만 때가 되면 지원해 줄 거라고 내심 믿었죠. 그런데 도와주지 않더라고요.”

오세훈 서울시장은 5월 ‘약자와의 동행’을 내세우며 2026년까지 6000억 원을 들여 공공병원 2개를 짓겠다고 발표했다. 백 씨 생각은 그럴 돈으로 현재 잘하고 있는 공공병원 성격의 민간병원 10개 정도를 지원해 준다면 적은 비용으로 환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중증 어린이 치료에 대해 보험 수가를 1.5배 정도 올려줘도 당장 적자 고민은 해소된다.

“정부는 푸르메 재활병원이 사회복지시설 용지에 지어졌으니 요양병원이라며 어린이 치료에 적용되는 1.5배의 ‘시범수가’를 적용해 줄 수 없다고 합니다. 국내 유일 어린이재활병원을, 마포구가 내준 땅이 의료시설용이 아니란 이유로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죠. 이번에는 부지의 용도를 바꿔 달라고 마포구에 요청했지만 힘들다는 입장입니다.”

공무원들의 무책임과 관료주의는 21세기를 사반세기나 지나가는 시점에도 여전한가 보다.
○장애 청년들의 일터가 될 농장 사업

그의 관심은 재활에서 자활(自活)로 뻗어가고 있다. 재활치료를 열심히 받은 어린이들이 청년이 되면 평생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가 농장 짓기에 나선 이유다. 우연히 농사가 자폐나 발달장애 청년에게 도움이 된다는 걸 알게 됐다.

장애 청년 일자리를 위한 농장을 만들겠다고 캠페인을 시작하자 발달장애 아들(33)을 둔 이상훈 장춘순 부부가 경기 여주시 오학동의 농장 부지 3800평을 기부했다. 이 땅에 건축비 130억 원을 들여 1200평의 유리온실과 카페 식당 등을 짓고 9월 오픈식을 했다. 현재 장애 청년 53명이 일하는데, 인근 SK하이닉스에서 건축비와 운영비를 도와줬고 농장에서 생산된 토마토와 버섯을 모두 사주는 등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종종 농장을 방문한 분들이 장애 청년들이 하루 4시간 일하고 월급 100만 원씩을 받는다고 하면 ‘외국인 노동자 4명 고용하면 될 텐데’라며 혀를 차세요. 하지만 우린 생산성이 아니라 이 청년들의 행복을 원하는 거예요. 추구하는 가치가 다른 거죠.”

―농장 분위기는 어때요?

“행복하죠. 처음엔 눈도 안 마주치던 친구들이 다가와 먼저 인사를 하지요. 청년들은 또래집단을 통해 사회성을 배우게 됩니다. 일자리와 월급이 그들에게 자존감을 높여줘요.”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

다리 근육이 굳어 휠체어에 의존해 살던 이주언 군은 중학교 입학을 1년 미루고 무릎관절 수술을 받은 뒤 푸르메 재활병원에 입원해 집중 운동치료를 받았다. 중학교에는 난생처음 걸어서 등교했다.푸르메재단 제공
서울 종로구 효자동에 4층짜리 푸르메재단 건물이 서 있다. 320평 건평에 1층은 장애인치과, 2층은 어린이재활의원, 3층 장애인복지관, 4층에는 재단 사무실이 있다. 종로구 땅을 빌려 재단이 75억 원을 들여 새 건물을 지은 뒤 기부채납했다. 재단은 이곳과 상암동 어린이재활병원, 여주 푸르메 소셜팜 등 여러 장애인을 위한 시설 운영을 책임진다.

―‘인구 10%가 장애인’이란 표현은 맞는 건가요.

“선진국은 그보다 높습니다. 한국은 등록장애인이 264만 명(2021년)이니 5∼6% 정도인 셈인데, 통계에 잡히지 않는 수가 많아요. 엄마들은 아이의 발달장애가 나아질 거라고 믿죠. 장애인 등록이 낙인 효과를 가져오거나 형제자매가 불이익을 받을까 걱정합니다. 노화나 질병으로 인한 기능부전도 모두 장애예요. 장수사회에서 장애인은 늘어날 수밖에 없어요.”

10년 후를 바라보며 그에게는 꿈이 몇 개 더 있다. 푸르메 병원과 농장 모델을 가난한 동남아국가에 세워 보는 일, 북한 장애 어린이 재활을 돕는 일 등이다. 그의 날개가 더 넓은 곳으로 펼쳐지기를 기대해 본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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