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최소한의 돌봄

기자 2022. 12. 17.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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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 앞에서 한 아이와 마주쳤다. 예닐곱 정도로 보이는 아이는 내가 들고 있던 커다란 사진 앨범이 신기한지 계속 나를 올려다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의 엄마가 앨범의 용도를 설명해주었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짧은 시간 동안 내가 앨범 안에 어떤 사진이 있는지 설명해주자 아이도 엄마에게 그런 앨범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엄마의 흔쾌한 허락에 좋아진 기분 때문이었는지, 다정한 기운을 건네듯 아이는 내게 작별인사를 해주었다. 경계와 호기심이 섞인 눈으로 나를 보던 몇 분 전보다 훨씬 따뜻한 얼굴로 내게 손을 흔들었다.

최정애 전남대 교수·소설가

내가 들고 있던 앨범은 부모님 댁에서 가져온 나의 어린 시절 사진이 담긴 것이었다. 갓 100일 된 딸을 목말 태우고 커다란 벚꽃 나무 앞에서 포즈를 취한 아버지 사진, 사촌들과 친구들과 동네 골목에서 뛰놀던 사진이 거기 담겨 있었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마을은 도시 한복판이었지만, 어느 집 식탁에 수저가 몇 개 올라가는지 서로 알고 있을 정도로 유대가 깊은 곳이었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우리 가족사를 다 알고 있던 마을 어른들은 내게 훈수를 두기 일쑤였다. 그 탓에 나는 줄곧 좁은 마을을 빠져나와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마을에서 벗어나 여러 도시를 옮겨 다니며 살았다. 함께 놀던 친구들도 모두 그곳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동안 나는 도시에 뒤섞인 사람들이 빚어내는 익명성에 익숙해졌다. 수개월 전 이사 온 지금의 집에서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 아직도 모른다.

집에 들어와 앨범을 정리하는 중에 손을 흔드는 아이 옆에서 내게 인사하던 아이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옷매무새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지만, 아이의 손을 잡고 웃으며 인사하던 옆얼굴이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었다. 육아를 해본 적 없는 나조차도 아이의 성장을 위해 애쓸 아이 엄마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힘겹게 느껴졌다. 육아를 감당해내기 힘들지 않으냐고 묻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아이를 키우는 것마저 오로지 개인이 감당할 몫이 된 이 사회에서 임신, 출산, 육아란 도대체 얼마나 힘든 일일까 하는 생각을 자주하고 있었다.

사진을 들춰보며 어렸을 때의 나와 방금 만난 아이를 생각했다. 앨범 속에는 할머니와 고모들, 삼촌들도 있었지만 지금은 연락이 끊긴 어른들도 있었다. 매일 자전거를 태워주시던 슈퍼 할아버지, 물장구치라고 큰 양동이를 갖다 주시던 옆집 아주머니, 골목에서 노는 아이들 이름을 무람없이 부르던 동네 어른들.

어른들은 누구든 마을의 아이들을 돌볼 준비가 돼 있었다. 밝게 웃고 있는 사진 속 내 옆에는 지금은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 어른들도 있었다. 그들 모두가 그 마을 아이들의 보호자였다. 그러니 어른들은 당연히 어린 내게 조심하라며 훈수를 둘 자격을 갖추었던 것이다.

아이를 낳고 사는 내 친구들 대부분은 혼자서 육아를 감당하다가 회사를 그만두거나 일을 미뤘다. 집안 어른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아이를 맡길 데가 없어 쩔쩔맸다. 그런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 역시 임신과 육아란 얼마나 무서운 일일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다 조카가 태어나던 순간, 그 아이가 밝게 웃는 때, 나를 성장시키는 일보다 더 고귀한 일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조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는 동네 어르신들이 봉사를 나오신다. 아이들은 동네 할머니와 김치를 담그고, 할아버지와 운동도 함께한다. 육아를 전문으로 하는 어린이집의 돌봄과 어린 시절 내가 겪은 것처럼 기꺼이 온 마을이 참여하는 돌봄은 전혀 다르다. 하지만 어린이집의 그런 활동 덕에 변화한 도시 환경 속에서도 아이가 낯선 어른들과 계속해서 건강한 부딪침을 겪으며 자랄 거라고 생각한다.

부모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겪으며 사는 것은 아이의 사회적 시선과 활동 반경을 넓히는 일이기도 하다. 돌봄은 부모나 조부모만의 일거리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감당할 당연한 공동체의 책임이다. 이것은 일시적으로 육아를 위한 수당을 증가시킨다고 해서 나아질 차원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할 일이 있다. 아이들에게 따뜻한 인사를 나눠주는 것. 아이들이 보호받지 못하는 순간에 주변의 어른이면 누구라도 나서서 도와주는 것. 무엇보다 정부가 돌봄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의 전환을 이루도록 시민으로서 감시하고 행동하는 것.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느슨한 네트워크 속에서 작동하는 사회적 연대야말로 급격히 낮아지는 출생률의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돌봄인 것이다.

최정애 전남대 교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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