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의 얼굴’을 한 사상가, 그의 궤적을 들여다보다

김용출 2022. 12. 17.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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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8년 피렌체 공화국 서기장 선출
만 29세에 협상가이자 대변인 역할
가까이서 본 권력 민낯 ‘군주론’ 집필
500년 세월 관통하는 정치철학 담아
“완벽한 정치인, 사자·여우를 체화해야”

마키아벨리/폴커 라인하르트/최호영·김하락 옮김/북캠퍼스/2만9000원

“완벽한 정치인은 파렴치할 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속임수도 쓰고, 계약도 파기할 줄 알아야 한다. 완벽한 정치인은 사자와 여우 둘을 체화해야 한다…. 자비를 베풀려고 부자와 권세가를 속박하지 않는 군주는 실제로는 무자비한 자다. 그 나약함의 대가를 평민들이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보증된 도덕 규칙은 정치에서 무력할뿐더러 완전히 비생산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여의도 정치나 전도된 현실 세계에서 자주 들을 만한, 아주 야박하면서도 완전히 외면할 수도 없는 이야기들로, 모두 정치학의 비조로 평가되는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주장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 등을 통해 자신이 본 인간과 권력의 속성, 정치의 본질, 지도자의 자질인 포르투나(운)와 비르투(능력)를 이야기한다. 이런 마키아벨리에 대해, 계몽주의자 장 자크 루소는 ‘공화주의자의 친구’라고 했고, 역사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의 특징을 순수하게 재현한 인물로 평가했다. 파시스트 베니토 무솔리니는 진정한 ‘정치의 예언자’로 바라본 반면, 안토니오 그람시는 파시즘과 나치즘의 선구자로 간주되는 것을 반대하며 당대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 ‘시대의 아들’이라고 봤다.
마키아벨리는 500여년 전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 등을 통해 인간과 권력의 속성, 정치의 본질, 포르투나(운)와 비르투(능력)에 대해 묘파했다. 출판사 제공
마키아벨리는 이처럼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고, 지금도 여러 가면을 쓰고 우리에게 나타난다. 냉혹한 군주의 조언자로, 신념에 찬 공화주의자로, 냉철한 현실주의자로, 때론 양심과 도덕을 믿지 않는 불가지론자로, 인간을 조소하는 냉소주의자로, 현실 정치의 분석가로….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국가를 신앙처럼 떠받들고 찬양하는 태도나, 국가를 위해 개인을 희생해도 좋다는 신념 등은 의심쩍기도 하지만.
분명한 건, 마키아벨리의 사상이 500년 넘는 세월을 뛰어넘어 21세기에도 여전히 영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그의 사상은 어떻게 형성됐을까. 그는 어떤 시대에 살았고, 어떤 경험과 관찰 속에서 이런 결론을 도출한 것일까. 르네상스 시대 문제적 인물에 천착해온 스위스 프리부르대학 교수 폴커 라인하르트는 책에서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책을 읽고 나면, 마키아벨리의 주장 및 의미가 새롭게 다가올지도.
폴커 라인하르트/최호영·김하락 옮김/북캠퍼스/2만9000원
책에 따르면, 마키아벨리의 결정적 여정은 1498년 5월 피렌체 공화국의 외교 실무를 담당하는 제2서기국 서기장으로 선출되면서 시작된다. 공식 직함은 ‘10인 전쟁위원회의 비서관’. 그의 나이 만 29세였다.

당시 피렌체는 1492년 ‘위대한 군주’로 알려진 로렌초 데 메디치가 죽고 그의 장남 피에로 데 메디치가 바통을 이었지만 무능한 데다 피사를 잃으면서 퇴출된 뒤 공화정 체제였다. 산마르코 수도원장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종교적 카리스마를 앞세워 귀족들을 제압하고 공화국을 세웠다. 하지만 그 역시 물리력 없이 종말론으로 공포를 자극하다가 사기꾼으로 몰려 화형당했고, 온건 중도 성향의 피에로 소데리니가 그 뒤를 잇고 있었다. 특히 아버지인 로마 교황에 프랑스 지지까지 업은 체사레 보르자가 이탈리아 내에서 실력자로 부상했지만, 피렌체는 같은 공화국이면서 힘에 의한 확장 정책을 추구한 베네치아와 공화국 연대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이에 크고 작은 분쟁과 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피렌체 공화국을 위해 협상자이자 대변인, 연구자이자 스파이로서 분투해야 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자신만의 독자적인 사상을 형성하게 됐다.

첫 번째 임무는 1499년 피사를 탈환하기 위해 피옴비노의 용병대장 야코포 다피아노와 로마냐 포를리의 카테리나 스포르자를 접촉하는 것이었다. 그는 야코프로부터 자금과 병력을 추가 지원받지 못하면 작전에서 빠지겠다는 말을 듣고 달콤한 말로 달래야 했다. 그는 이때 나라 안보를 용병에 의존하게 되면 위험해진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듬해에는 프랑스 루이 12세를 찾아가 밀라노를 점령하고 영토를 확대 중인 체사레 보르자의 자제를 촉구하게 해야 했다. 하지만 루이 12세는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했고, 피렌체가 돈을 보내자 비로소 움직였다. 그는 권력에 가까울수록 야망에 사로잡히고, 현실 정치에선 도덕이나 양심으로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걸 절감했다. 그는 1502년 체사레 보르자가 피렌체 동쪽의 우르비노 공국을 점령하자 우르비노로 달려가 체사레 보르자를 대면한 자리에서 협박을 들어야 했다. “나는 당신네 정부 체제가 마음에 들지 않고 그것을 믿을 수 없소.” 체사레 보르자에게 강한 인상을 받은 그는 나중에 ‘군주론’에 자세히 다루게 된다.
이상적인 군주의 상징 밀라노의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왼쪽)와 무자비한 군주의 상징 체사레 보르자.
이듬해 로마에 파견됐다가 새 교황 율리오 2세의 선출과 체사레 보르자의 몰락을 지켜본다. 알렉산데르 6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체사레 보르자는 자신을 비호해 주겠다는 율리오 2세의 말만 믿었다가 새 교황에게 붙잡혀 몰락한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1510년 교황 율리오 2세와 프랑스 루이 12세 간 갈등이 가시화해 전쟁 위기에 내몰리자 프랑스 왕을 다시 찾아가 피렌체를 보호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1512년 프랑스가 교황과 스페인 연합군에 패배하면서 피렌체 공화국도 함락됐다. 공화국은 해체돼 메디치 가문에 의한 군주국으로 돌아갔고, 마키아벨리는 공직에서 퇴출됐다. 그는 이때 포르투나와 비르투의 힘과 한계를, 사자와 여우의 역할을 깨닫게 된다.

1513년 메디치 가문 암살 음모에 연루된 혐의로 체포돼 고문을 받기도 했던 그는 감시 속에서 메디치 가문의 군주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바치기 위해 ‘군주론’을 저술했다. “인간은 원래 배은망덕하고 변덕스러우며 위선적이고 위험을 피하고 이익을 탐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곤경이 멀리 있을 때만 피와 재산, 목숨과 아들까지 바치려 합니다. 그러나 막상 곤경이 코앞에 닥치면 등을 돌립니다.”

그는 신민의 사랑에만 의존하는 군주는 버림받는다며 다수를 이롭게 하는 무자비함은 정당하다고 조언했다. 지도자는 힘과 공포의 기술을 탁월하게 구사해야 하고, 사자와 여우를 체화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사랑받는 것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나은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라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둘 다 겸비하기란 어려우므로,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사랑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편이 훨씬 더 안전합니다…. 사랑은 의무라는 사슬을 수반하는데, 사람들은 악하여서 기회가 생길 때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를 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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