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왕국 모로코 축구 반란, MENA권 희망의 슛 쏘다
지구촌 정치 지형 바꾼 월드컵
올해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중동·북아프리카(MENA)권에서 처음 4강에 오른 모로코의 활약이 단연 이목을 끈다. 인구 3600만 명에 프랑스(약 130만 명)·스페인(93만 명)·벨기에(53만 명)·이탈리아(49만 명)·이스라엘(47만 명)·네덜란드(42만 명)·독일(24만 명) 등 해외 거주민이 500만 명에 이르는 모로코는 그동안 MENA권에서도 별 주목을 받지 못하는 조용한 왕국이었다.
하지만 FIFA 순위 22위인 모로코가 조별리그 F조에서 크로아티아와 비긴 뒤 벨기에(2위)와 캐나다를 이기고 16강에 오르면서 주목의 대상이 됐다. 이후 16강전에서 스페인(7위), 8강전에서 포르투갈(9위)을 잇따라 꺾으면서 일약 화제의 팀으로 떠올랐다.
비록 준결승에서 프랑스(4위)에 0-2로 패해 결승 진출의 꿈은 다음으로 미뤘지만 이들의 선전은 모로코인 이주 역사가 100년이 넘는 프랑스·벨기에 등에서의 대규모 축하 행렬로 이어졌다. AP·AFP 통신 등에 따르면 파리와 브뤼셀 등에서 일부 흥분한 응원단이 과격한 행동을 벌이기도 했지만 다행히 큰 불상사 없이 마무리됐다. 모로코의 4강 진출로 중동·이슬람권과 아프리카권에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긍정적 사고가 확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반면 이번 월드컵으로 정치적 타격을 입은 나라들도 적잖다. 이란과 중국이 대표적이다. 이란은 지난 9월 16일 20대 여성 마흐사 아미니가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율순찰대(가쉬테에르셔드)에 잡혀갔다가 숨지면서 항의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됐다. 1979년 이슬람혁명 이후 이란에 신정 체제가 들어선 뒤 이란 여성은 머리를 가리는 히잡 또는 목까지 감싸는 ‘마그나에’라는 긴 히잡을 쓰거나 온몸을 가리고 얼굴만 내놓는 차도르를 입어야만 했다.
이런 상황이 40년 이상 계속되면서 이란의 젊은이 사이에서 불만이 팽배했는데 아미니 사건이 불을 지른 셈이 됐다. 의문사 항의로 시작된 시위는 인권과 여성 권리 보장을 넘어 신정 체제의 기득권 폐지와 정치적 권리 요구로 목소리를 키워가고 있다. 요구 사항은 ‘여성, 생명, 자유’라는 구호로 수렴됐다.
놀란 이란 정부가 바시지 민병대를 비롯한 군경을 동원해 폭력적인 진압에 나서면서 희생자도 다수 발생했다. 로이터 통신은 지난 8일 현재 531명이 숨지고 1160명이 부상당했다고 보도했다. 노르웨이 오슬로에 본부를 둔 이란휴먼라이츠(IHR)도 이란 전역의 134개 도시와 마을, 132개 대학에서 시위가 발생해 1만8210명이 체포됐다고 전했다.
이처럼 시위가 격화되는 가운데 페르시아만을 사이에 두고 이란과 190㎞ 정도 떨어진 카타르에서 열린 월드컵은 전 세계에 이란의 상황을 알리는 전령 구실을 했다. 지난달 21일 카타르 도하의 칼리파 인터내셔널 스타디움에서 열린 잉글랜드와의 B조 1차전에서는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이란 대표팀 선수들이 입을 굳게 다물기도 했다. 이란 팬들도 관중석 곳곳에서 플래카드를 들고 연대를 표시했다. 초유의 국가 제창 거부 사태에 이란 당국도 한발 물러났다. AFP 통신에 따르면 모하마드 자파르 몬타제리 이란 검찰총장은 지난 4일 기율순찰대의 해체를 발표했다. 귀추를 지켜봐야겠지만 시위 진정을 위해 일정 부분 타협한 것으로 보인다.
통제 위주의 ‘제로 코로나’ 정책을 유지해 온 중국도 월드컵의 충격을 피하지 못했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지난달 29일 샤를 미셸 유럽연합(EU) 상임위원장을 만나 “오미크론은 치명률이 낮다”며 제로 코로나 완화를 시사했다. 월드컵이 시작된 뒤 지난달 25일부터 제로 코로나 반대 시위가 전국적으로 벌어진 데 대한 신속 대응 차원으로 보인다.
발단은 지난달 24일 신장위구르의 우루무치에서 발생한 아파트 화재로 10명이 숨지고 9명이 부상한 사건이었다. 단지를 봉쇄하는 무리한 방역으로 소방대원 진입이 어려워 희생자가 많아진 것으로 전해지면서 전국적인 시위를 불렀다. 지난달 26일 상하이에선 시위대가 “공산당 물러나라. 시진핑 물러나라”는 구호를 외쳤고, 27일엔 시 주석 모교인 베이징 칭화대에서 학생들이 A4 용지를 들고 백지 시위를 벌였다. 시위가 예상외로 확산된 데는 월드컵 방송 중계를 통해 전해진 노마스크의 카타르 현지 모습이 제로 코로나를 이유로 통제를 강화하고 마스크 착용을 강제하는 중국과는 너무도 달랐던 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힘을 얻는다.
하지만 2018년 월드컵 개최국인 러시아엔 월드컵 효과가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다. 경기장에선 함성이 쏟아지지만 우크라이나 전선에선 하루에도 수백 명씩 숨져가고 집을 잃은 피란민이 1360만 명에 이르는 비극은 여전하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이 남긴 지구촌의 빛과 그림자다.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tzschaei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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