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병? 조수미 드레스는 자신감, 늙지 않는 징표죠

유주현 2022. 12. 17.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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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소프라노 조수미와 디자이너 서승연
소프라노 조수미가 3년 만에 앨범을 냈다. 김효근의 ‘첫사랑’, 윤학준의 ‘마중’ 등 우리말 사랑노래로만 엮은 앨범 ‘사랑할 때(In Love)’다. 팬데믹을 겪고 난 지금이 가장 절실하게 ‘사랑할 때’인 것 같아 정성을 쏟았다고. 자신의 첫사랑을 떠올리며 녹음했다는 11곡을 들어보면 끓어 넘치는 사랑에 고막이 화상을 입을 지경이다.

조수미가 말하는 ‘사랑’이 꼭 연애감정만은 아니다. 일에 대한 열정, 동료에 대한 우정, 이웃에 대한 연민, 삶에 대한 애착일 수도 있다. 지난 10월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테이크 원’의 첫 에피소드를 장식한 그가 ‘단 한 번의 공연’을 위해 올인하는 모습을 보면 그가 삶 자체를 얼마나 사랑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우리말 사랑노래 엮은 새 앨범 내놔

소프라노 조수미(오른쪽)는 13년째 디자이너 서승연의 드레스만 입는다. 23일 예술의전당 콘서트 오프닝을 장식할 ‘첫사랑’ 드레스. 김경빈 기자
드레스에 대한 사랑도 만만찮다. 20여 년간 앙드레 김의 드레스만 사랑하다 ‘앙 선생’ 작고 후 13년째 서승연의 드레스에 일편단심이다. 2010년 독일 가곡 ‘너를 사랑해(Ich Liebe Dich)’ 앨범 재킷 촬영이 맺어준 두 사람은 지금도 열렬한 ‘In Love’ 상태다.

“제가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라 자랑하고 싶어요. 앙 선생님이 편찮으실 때 운명처럼 만났죠. 호텔 스위트룸에 30여벌의 세계 명품 드레스를 깔아놓고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가 유독 눈에 띤 한 벌이 있었어요. 디올이냐, 구찌냐 물었더니 ‘서승연’이라길래 기가 막혔죠. 옷이 너무 아방가르드 쪽이라 한국인이 만들었다고는 생각 못했거든요.”(조) “그 앨범이 아카데믹한 독일 가곡을 화려하게 해석한 독특한 컨셉트라서 선택받은 것 같아요. 타이밍이 절묘했죠.”(서)

운명의 불꽃이 튄 건 두 사람의 코드가 딱 만났기 때문이다. 클래식 그 자체면서도 한국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드레스는 앙드레 김 시절부터 조수미의 시그니처였다. “동양인이 오페라 무대에 서는 게 거의 최초였으니 처음엔 저도 서양인 흉내를 냈어요. 그러다 앙 선생님을 만났고, 동양의 신비함과 고급스러움을 살린 옷이 어딜 가나 화제가 됐죠. 선생님은 공연 때마다 제일 앞줄에 앉으셔서 박수받는 걸 즐기셨는데 하루는 제가 깜빡하고 인사를 못 시켜드렸어요. 단단히 삐지셔서 1주일간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서 간신히 용서받았던 기억이 나네요.(웃음)”(조) “저도 앙 선생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매장 오픈할 때 직접 찾아가서 초대장을 드릴 정도로 존경했던 분이죠. ‘공주 드레스’지만 단순히 복식사의 재현이 아니라 한국적 요소를 살려 창조하는 게 제 스타일인데 알아봐 주셔서 정말 기뻤습니다.”(서)

서승연 드레스에 첫눈에 반한 조수미는 직접 꽃다발을 들고 찾아갔고, 이후 그 사랑은 변할 줄 몰랐다. 대통령 취임식, 올림픽 개막식 등 대형 행사에서 다른 디자이너도 숱하게 추천받았지만 결코 한눈을 팔지 않았다. “저는 꼬맹이 때부터 남들과 전혀 다른 드레스를 만들고 싶었어요. 내 옷을 입은 사람은 그 순간 최고로 빛나는 옷을 만들고 싶은 게 꿈이었죠. 선생님은 그 꿈을 이뤄주셨고, 다소 과해 보이는 제 옷을 200% 소화하는 유일한 분이에요.”(서)

‘조수미의 그녀’란 타이틀은 날개가 됐다. 걸그룹 소녀시대부터 에스파, 아이유, BTS 등 아이돌까지 몰려들었다. 성악가의 무대의상에서 K팝 무대의상이 파생됐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선생님 덕에 ‘앙드레 김 다음 서승연’이 됐어요. K팝 스타일리스트들도 ‘최고를 입히겠다’며 찾아왔죠. BTS도 남성 아티스트로선 선구적으로 화려하고 고급스런 의상을 찾아 제게 왔고요. K팝 의상은 하루만에 만들어내야 할 때도 있는데, 다 조수미 드레스 만들면서 쌓인 노하우와 시스템이 있어 가능한 일이죠.”(서)

넷플릭스 ‘테이크 원’ 에서 오펜바흐의 ‘인형의 노래’를 국악 콜라보로 부르는 조수미. [사진 넷플릭스]
평범한 여성이라면 평생 한두 번 입는 드레스를 조수미는 족히 500벌은 넘게 입었다. 드레스 차림으로 슈퍼마켓도 갈수 있을 정도란다. “언젠가 미장원에 갔더니 드레스를 입고 다니는 게 아니었냐며 실망하더군요. 사실 그러고 싶어요. 서승연 드레스를 입었을 때 가장 나답고 행복하고, 벗는 순간 신데렐라가 호박마차에서 내렸을 때처럼 싫은 기분이 들죠. 전 계속 이렇게 살고 싶어요. 공주병이라고요? 인정합니다.(웃음)”(조) “감사하게도 선생님은 처음 뵙던 십여 년 전과 지금 치수가 똑같아요. 그때 만든 마네킹에 맞추면 안 입어 봐도 될 정도죠.”(서) “솔직히 노래하려면 폭식하고 싶을 때도 있거든요. 하지만 서승연 드레스를 입으려면 손 떨면서 먹어야 해요. 선생님 생각하며 포크를 놓을 때가 많습니다.”(조)

조수미에게 드레스란 노래만큼이나 중요한 예술의 일부다. 매번 컨셉트를 직접 정해서 제작을 의뢰하는 이유다. “요즘 성악가들은 의상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요. 나처럼 한 번 공연에 드레스를 4~5벌 입는 사람은 세상에 없죠. 숍에서 200달러짜리를 사 입곤 하던데, 나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렇게 못해요. 내 공연은 늘 컨셉트가 있고, 드레스는 내 트레이드 마크니까요. 그래서 선생님도 굉장히 신경을 쓰세요. 바로크 콘서트라면 비발디, 헨델부터 공부해야 하니 고생이 많으실 거예요.”(조)

실제로 서승연은 조수미 드레스를 작업할 때 기도로 시작한다고. 자신의 컬렉션과는 전혀 다르게 접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매번 새로운 컨셉트를 주시니까요. 사실 제일 어려운 게 컨셉트인데, 첫 숙제를 늘 해결해 주시는 셈이긴 해요. 하지만 디자인에는 정답이 없거든요. 내가 생각하는 방향과 선생님 생각이 잘 맞고, 중간에 아무 사고 없이 잘 완성되기를 기도하는 거죠.”(서)

넷플릭스 시리즈 ‘테이크 원’에서 그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조수미가 오펜바흐의 ‘인형의 노래’를 국악과 결합시키는 과정이 드라마틱한데, ‘씬스틸러’는 단연 드레스다. 얼핏 화려한 서양 인형옷 같지만, 잘 보면 핑크와 초록으로 색동을 재해석하고, 자수 골무를 주렁주렁 매달아 만든 노리개로 포인트를 준 ‘K드레스’다. “아마 제일 힘든 작업이었을 걸요. 전 세계에서 공연되는 오펜바흐의 가장 유명한 노래를 한국적으로 풀어달라 해놓고 나도 잠이 안 오더군요. 딱 보는 순간 정말 천재다 싶었죠.”(조) “소매의 색동은 ‘조수미 색동’이라고 이름지었어요. 색동이란 게 어린아이들을 귀하게 지키는 의미라서 꼭 쓰고 싶은데 예쁜 한국인형이면서도 유러피안 실루엣과 어울리는 컬러를 찾느라 고생 좀 했죠.”(서)

베이스바리톤 길병민과 ‘첫사랑’ 듀엣

조수미는 우리 노래만 수록한 이번 앨범에 “왜 그런지 가장 정성을 쏟게 됐다”고 했다. 1994년 처음 워너뮤직에서 음반을 낼 때, 우리 가곡 ‘보리밭’을 넣지 않으면 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했을 만큼 조수미는 우리 노래를 사랑한다. “우리가 이렇게 잘 살게 된 게 얼마 안 돼요. 83년에 유럽에 가니 아무도 한국을 몰라요. 공항에서 내 여권을 보면서 남한이냐 북한이냐 격리시켜서 조사하느라 비행기가 못 뜨는, 이런 경우를 계속 당하면 정말 손톱으로 할퀴면서라도 한국을 지켜야 된다는 마음이 들죠. 부모님이 무시당하는 느낌이랄까? 내가 정말 잘 돼야 한다 는 의지가 피에서 솟아나 파이오니어처럼 살았어요. 나뿐 아니라 우리 세대는 다 그렇게 투철했죠.”

통통 튈 듯 즐겁게 얘기하다가도 나이 얘기가 나오니 금세 새침해진다. 자칭 ‘영 앤 피어리스’ 정신으로 살아서인지 그는 여전히 소녀였다. 가곡 ‘첫사랑’을 녹음할 때도 첫사랑과 첫눈 올 때 만나자던 약속을 떠올렸단다. “녹음할 때 되게 짠했어요. 그때 멋졌던 그 모습만 기억하고 싶은데,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잘 안나더군요. 그분이 가끔 내 공연에 오시는 건 알고 있어요. 그런 멋진 사랑을 할 수 있고, 그때 느낀 사랑을 음악에 녹일 수 있어서 감사할 뿐이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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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그 사랑을 온전히 전한다. 음반에 참여한 첼리스트 홍진호, 바이올리니스트 대니 구, 베이스바리톤 길병민 등도 모두 함께한다. 물론 서승연 드레스를 입는다. 오프닝인 ‘첫사랑’ 드레스에 특히 공을 들였다는데, 인터뷰를 위해 살짝 착장 모습을 공개했다. “지금 입고 계신 드레스에요. 가장 스위트하고 파릇파릇한 첫사랑의 설레임을 담았죠. 선생님은 이 무거운 걸 입고 팔짝팔짝 무대를 누비는 영원한 소녀거든요. ‘관객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한다’는 애티튜드가 세계적 소프라노를 만든 것 같아요.”(서) “드레스는 내 자신감이자 관객에 대한 예의거든요. 무대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옷을 입고 노래하는 건 관객에게 꿈과 환상을 주기 위해서죠. 그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아서 조수미는 늙으면 안 돼요. 앞으로 10년 더 서승연 드레스를 입으려면 다이어트도 열심히 해야겠죠.(웃음)”(조)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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