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병? 조수미 드레스는 자신감, 늙지 않는 징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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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소프라노 조수미와 디자이너 서승연
소프라노 조수미가 3년 만에 앨범을 냈다. 김효근의 ‘첫사랑’, 윤학준의 ‘마중’ 등 우리말 사랑노래로만 엮은 앨범 ‘사랑할 때(In Love)’다. 팬데믹을 겪고 난 지금이 가장 절실하게 ‘사랑할 때’인 것 같아 정성을 쏟았다고. 자신의 첫사랑을 떠올리며 녹음했다는 11곡을 들어보면 끓어 넘치는 사랑에 고막이 화상을 입을 지경이다.
조수미가 말하는 ‘사랑’이 꼭 연애감정만은 아니다. 일에 대한 열정, 동료에 대한 우정, 이웃에 대한 연민, 삶에 대한 애착일 수도 있다. 지난 10월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테이크 원’의 첫 에피소드를 장식한 그가 ‘단 한 번의 공연’을 위해 올인하는 모습을 보면 그가 삶 자체를 얼마나 사랑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우리말 사랑노래 엮은 새 앨범 내놔
“제가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라 자랑하고 싶어요. 앙 선생님이 편찮으실 때 운명처럼 만났죠. 호텔 스위트룸에 30여벌의 세계 명품 드레스를 깔아놓고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가 유독 눈에 띤 한 벌이 있었어요. 디올이냐, 구찌냐 물었더니 ‘서승연’이라길래 기가 막혔죠. 옷이 너무 아방가르드 쪽이라 한국인이 만들었다고는 생각 못했거든요.”(조) “그 앨범이 아카데믹한 독일 가곡을 화려하게 해석한 독특한 컨셉트라서 선택받은 것 같아요. 타이밍이 절묘했죠.”(서)
운명의 불꽃이 튄 건 두 사람의 코드가 딱 만났기 때문이다. 클래식 그 자체면서도 한국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드레스는 앙드레 김 시절부터 조수미의 시그니처였다. “동양인이 오페라 무대에 서는 게 거의 최초였으니 처음엔 저도 서양인 흉내를 냈어요. 그러다 앙 선생님을 만났고, 동양의 신비함과 고급스러움을 살린 옷이 어딜 가나 화제가 됐죠. 선생님은 공연 때마다 제일 앞줄에 앉으셔서 박수받는 걸 즐기셨는데 하루는 제가 깜빡하고 인사를 못 시켜드렸어요. 단단히 삐지셔서 1주일간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서 간신히 용서받았던 기억이 나네요.(웃음)”(조) “저도 앙 선생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매장 오픈할 때 직접 찾아가서 초대장을 드릴 정도로 존경했던 분이죠. ‘공주 드레스’지만 단순히 복식사의 재현이 아니라 한국적 요소를 살려 창조하는 게 제 스타일인데 알아봐 주셔서 정말 기뻤습니다.”(서)
서승연 드레스에 첫눈에 반한 조수미는 직접 꽃다발을 들고 찾아갔고, 이후 그 사랑은 변할 줄 몰랐다. 대통령 취임식, 올림픽 개막식 등 대형 행사에서 다른 디자이너도 숱하게 추천받았지만 결코 한눈을 팔지 않았다. “저는 꼬맹이 때부터 남들과 전혀 다른 드레스를 만들고 싶었어요. 내 옷을 입은 사람은 그 순간 최고로 빛나는 옷을 만들고 싶은 게 꿈이었죠. 선생님은 그 꿈을 이뤄주셨고, 다소 과해 보이는 제 옷을 200% 소화하는 유일한 분이에요.”(서)
‘조수미의 그녀’란 타이틀은 날개가 됐다. 걸그룹 소녀시대부터 에스파, 아이유, BTS 등 아이돌까지 몰려들었다. 성악가의 무대의상에서 K팝 무대의상이 파생됐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선생님 덕에 ‘앙드레 김 다음 서승연’이 됐어요. K팝 스타일리스트들도 ‘최고를 입히겠다’며 찾아왔죠. BTS도 남성 아티스트로선 선구적으로 화려하고 고급스런 의상을 찾아 제게 왔고요. K팝 의상은 하루만에 만들어내야 할 때도 있는데, 다 조수미 드레스 만들면서 쌓인 노하우와 시스템이 있어 가능한 일이죠.”(서)
조수미에게 드레스란 노래만큼이나 중요한 예술의 일부다. 매번 컨셉트를 직접 정해서 제작을 의뢰하는 이유다. “요즘 성악가들은 의상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요. 나처럼 한 번 공연에 드레스를 4~5벌 입는 사람은 세상에 없죠. 숍에서 200달러짜리를 사 입곤 하던데, 나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렇게 못해요. 내 공연은 늘 컨셉트가 있고, 드레스는 내 트레이드 마크니까요. 그래서 선생님도 굉장히 신경을 쓰세요. 바로크 콘서트라면 비발디, 헨델부터 공부해야 하니 고생이 많으실 거예요.”(조)
실제로 서승연은 조수미 드레스를 작업할 때 기도로 시작한다고. 자신의 컬렉션과는 전혀 다르게 접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매번 새로운 컨셉트를 주시니까요. 사실 제일 어려운 게 컨셉트인데, 첫 숙제를 늘 해결해 주시는 셈이긴 해요. 하지만 디자인에는 정답이 없거든요. 내가 생각하는 방향과 선생님 생각이 잘 맞고, 중간에 아무 사고 없이 잘 완성되기를 기도하는 거죠.”(서)
넷플릭스 시리즈 ‘테이크 원’에서 그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조수미가 오펜바흐의 ‘인형의 노래’를 국악과 결합시키는 과정이 드라마틱한데, ‘씬스틸러’는 단연 드레스다. 얼핏 화려한 서양 인형옷 같지만, 잘 보면 핑크와 초록으로 색동을 재해석하고, 자수 골무를 주렁주렁 매달아 만든 노리개로 포인트를 준 ‘K드레스’다. “아마 제일 힘든 작업이었을 걸요. 전 세계에서 공연되는 오펜바흐의 가장 유명한 노래를 한국적으로 풀어달라 해놓고 나도 잠이 안 오더군요. 딱 보는 순간 정말 천재다 싶었죠.”(조) “소매의 색동은 ‘조수미 색동’이라고 이름지었어요. 색동이란 게 어린아이들을 귀하게 지키는 의미라서 꼭 쓰고 싶은데 예쁜 한국인형이면서도 유러피안 실루엣과 어울리는 컬러를 찾느라 고생 좀 했죠.”(서)
베이스바리톤 길병민과 ‘첫사랑’ 듀엣
조수미는 우리 노래만 수록한 이번 앨범에 “왜 그런지 가장 정성을 쏟게 됐다”고 했다. 1994년 처음 워너뮤직에서 음반을 낼 때, 우리 가곡 ‘보리밭’을 넣지 않으면 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했을 만큼 조수미는 우리 노래를 사랑한다. “우리가 이렇게 잘 살게 된 게 얼마 안 돼요. 83년에 유럽에 가니 아무도 한국을 몰라요. 공항에서 내 여권을 보면서 남한이냐 북한이냐 격리시켜서 조사하느라 비행기가 못 뜨는, 이런 경우를 계속 당하면 정말 손톱으로 할퀴면서라도 한국을 지켜야 된다는 마음이 들죠. 부모님이 무시당하는 느낌이랄까? 내가 정말 잘 돼야 한다 는 의지가 피에서 솟아나 파이오니어처럼 살았어요. 나뿐 아니라 우리 세대는 다 그렇게 투철했죠.”
통통 튈 듯 즐겁게 얘기하다가도 나이 얘기가 나오니 금세 새침해진다. 자칭 ‘영 앤 피어리스’ 정신으로 살아서인지 그는 여전히 소녀였다. 가곡 ‘첫사랑’을 녹음할 때도 첫사랑과 첫눈 올 때 만나자던 약속을 떠올렸단다. “녹음할 때 되게 짠했어요. 그때 멋졌던 그 모습만 기억하고 싶은데,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잘 안나더군요. 그분이 가끔 내 공연에 오시는 건 알고 있어요. 그런 멋진 사랑을 할 수 있고, 그때 느낀 사랑을 음악에 녹일 수 있어서 감사할 뿐이죠.”(조)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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