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샹란 첫 도쿄 공연에 “3등 국민 주제에 제법” 열광

2022. 12. 17.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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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56〉
일본 패망 후 동북에 내걸린 연합국 수뇌들의 초상. 왼쪽부터 스탈린, 애틀리, 트루먼, 장제스. 1945년 겨울 선양(瀋陽). [사진 김명호]
1938년 10월, 만영(주식회사 만주영화협회) 이사장 아마카스 마사히코(甘粕正彦)는 일본에 파견할 ‘일·만 친선 대표단’ 명단을 보고 눈을 찌푸렸다. 리샹란(李香蘭·이향란)도 포함하라고 지시했다. “리꼬랑은 일본인이라 곤란하다”는 간부의 의견은 한마디로 묵살했다. “여권에 본명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와 예명 리샹란을 병기해라.”

난생처음 일본 땅을 밟은 리샹란은 입국 검사에서 황당한 질문을 받았다. “무슨 놈의 이름이 이 모양이냐? 중국인이냐 일본인이냐?” 리샹란은 일본인이라고 했지만 상대방은 믿지 않았다. “나는 사람 얼굴 보는 것이 직업이다. 일본 여자는 너처럼 생기지 않았다. 아버지가 러시아 사람이냐? 고향이 어디냐?” “푸순(撫順)이다. 부모가 일본인이다.” “일본인은 1등 국민이다. 1등 국민이 3등 국민 복장 입은 것은 치욕이다. 18세라는 네 나이도 믿을 수 없다.” 먼저 입국대를 통과한 인솔자가 달려왔다. 검사관 귀에 대고 뭐라고 하자 도장을 쿵 찍어줬다. 도쿄 공연에서 리샹란은 중국 옷 입고 일본 가곡을 간드러지게 불렀다. 박수가 터지고 난리가 났다. 모욕적인 언사도 빠지지 않았다. “3등 국민 주제에 제법이다. 일본에 태어났더라면 국보급이다.”

“조선인 부부, 유괴당한 딸 맞다며 통곡”

리샹란과 류바의 눈에 익은 푸순탄광의 석탄을 운송하는 만철 화물열차. [사진 김명호]
리샹란은 어릴 때부터 용모가 빼어났다. 순수한 일본인이라고 믿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어느 나라를 가건 자기 나라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리샹란의 회고록 일부를 소개한다. “하얼빈(哈爾賓)에 러시아 가수의 수양딸 역을 촬영하러 간 적이 있었다. 다들 나를 러시아 소녀라고 하기에 깜짝 놀랐다. 대만(臺灣)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생김새가 추장 딸과 똑같다며 고산족(高山族)들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나를 의자에 앉혀놓고 반은 벌거벗은 채 횃불 들고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췄다. 어찌나 무섭던지 온몸에 식은땀이 났다. 일본이 게이조(京城)라고 개명한, 지금의 서울 교외에서 조선총독부가 기획한 선전영화 촬영 중 불청객이 나타났다. 자신을 경찰서장이라 소개하며 부모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니 만나 보라고 명령했다. 나를 만난 조선인 노부부는 어렸을 때 유괴당해 만주로 팔려간 딸이 틀림없다며 통곡했다. 내가 부인하자 서장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노부부에게 기억나는 신체적 특징이 있느냐고 물었다. 왼쪽 손바닥에 커다란 점이 있다는 말에 찔끔했다. 나도 노부부가 지정한 곳에 작은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장에게 부모와 집안 내력을 설명했다. 이해한 서장은 용모가 만국통용이라 어쩔 수 없다. 비슷한 일이 빈번하겠다며 나를 위로했다.”
본국으로 돌아가는 일본 교민들은 승선(乘船) 전 철저한 몸수색을 받았다. [사진 김명호]
일본 패망 당시 중국 경내에는 일본군인 125만명과 교민 200만명이 있었다. 국민당에 투항한 일본군은 소련군에게 무장해제당한 관동군보다 사람대접을 받았다. 상하이의 경우 오전에는 거리 청소하고 오후에는 수용소에서 오락과 운동하며 귀국을 기다렸다. 10만명에 달하는 민간인도 격리 수용은 당했지만 생활에 큰 불편은 없었다. 한간(漢奸) 재판에 회부된 리샹란만큼은 예외였다. 몸 웅크린 채 결과만 기다렸다. 하루는 국민당 군 육군 소장의 방문을 받았다. 한쪽 귀가 없고 왼쪽 다리가 불편한 호걸풍의 중년남자였다. 리샹란에게 자신의 귀와 다리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마덴산(馬占山·마점산) 장군 참모 시절 일본군에게 포로가 됐다. 고문당하다 생긴 훈장”이라며 리샹란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침을 꼴깍 삼켰다. “내일 승전국 연회에 미군 간부들을 초대했다. 부디 참석해 미국인들에게 중국 1류 가수의 명곡 예라이샹(夜來香)을 들려주기 바란다.”

5류 신문 “문화 한간 리샹란 총살 집행”

1998년, 53년 만에 소련에서 류바와 재회한 야마구치 요시코. 당시 78세로 동갑이었다. [사진 김명호]
리샹란은 저도 모르게 영화 대사 같은 대답이 나왔다. “나는 이미 리샹란인지 뭔지가 아니다. 연금 상태로 귀국의 판결을 기다리는 패전국 국민 야마구치 요시코일 뿐이다. 성대가 망가져 노래를 부를 수 없어 유감이다. 통증으로 물 삼키기도 힘들다.” 폭소를 터뜨린 장군은 한마디 남기고 수용소를 떠났다. “내일 자동차를 보내겠다. 기름진 음식 많이 먹으면 목소리는 저절로 나온다. 나를 위해 예라이샹을 불러주기 바란다.” 잠시 후 일본 친구들이 달려와 충고했다. “방금 다녀간 장군은 음흉하기로 소문난 사람이다. 내일 갔다간 절대로 돌아오지 못한다.” 리샹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후, 3류도 부족한 5류 신문에 리샹란 관련 기사가 떴다. “1945년 12월 8일 오후 3시, 상하이 국제경마장에서 문화 한간 리샹란의 총살을 집행한다.” 처형 당일, 경마장은 리샹란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새벽부터 인산인해였다. 아무리 기다려도 주인공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들 빈 눈으로 발길을 돌렸다. 며칠간 같은 일이 반복됐다. 1946년 새해가 밝아도 리샹란은 건재했다. 수용소에 온 이후 연락이 두절됐던 류바가 리샹란을 찾아왔다. 푸순에서 어린 시절 함께했던 류바는 승전국 소련의 상하이 총영사관 직원이었다. 수용소 출입이 자유로웠다. 리샹란에게 살길을 알려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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