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한 살 더 먹을 결심
SNS로 곳곳 분열된 세상
타인에 대한 이해도 추락
공감력은 기질이 아닌 기술
좋은 어른이 된다는 것
포용과 관용의 폭이 좌우
김보라 문화부 차장
내가 이럴 줄은 몰랐다.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정수리 근처 머리카락을 들춰보며 삐죽 솟은 새치를 찾게 될 줄 몰랐고, 오후가 되면 반쯤 감은 눈으로 모니터의 글자 크기를 최대로 키워야 겨우 뭔가 볼 수 있게 될지 몰랐다. 밥 먹을 때마다 립스틱과 함께 치실을 꼭 갖고 다니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며, 자주 보는 사람들에게 실컷 소리 높여 재밌는 얘기라고 떠들다 어느 순간 ‘아, 이 얘기 전에 했었지’ 깨닫고 부랴부랴 화제를 돌리게 될 줄은, 나는 정말 몰랐다. 평생 관심도 없던 피부과 시술이나 영양제를 검색하게 된 것도 포함해서….
누가 나이를 숫자에 불과하다고 했는가.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는 일은 생각보다 가혹하다.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결코 아니다. 일단 몸이 바뀌고, 체력이 달린다. 존재조차 잊고 있던 몸의 어떤 부분이 갑자기 아프기도 하고, 거뜬하게 했던 어떤 운동은 갑자기 공포의 대상이 된다. 그러면서 생활 반경이 바뀌고, 덩달아 생각의 종류와 범위도 달라진다.
더 젊게 살아야겠다고 ‘억지로’ 하는 일은 더 비참한 결과를 낳는다. 요즘 애들 가는 곳에 가면 내내 불편하고, 요즘 애들 입는 옷을 입으면 우스꽝스러운 모습만 남는다. 요즘 애들의 말투는 매번 그 뜻을 생각하며 말하다 어색하고 바보스러운 발음만 생긴다. 이 ‘불편한 흉내 내기’ 때문에 더 빨리 늙을 수도 있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결심했다. 기왕 먹을 나이, 제대로 먹어보자고. 이번 연말은 사람들을 만나 떠들썩한 시간을 보내는 대신 스스로의 감정을 좀 더 들여다보기로 했다. 나이 먹는 것의 온갖 부정적인 것들 대신 좋은 점은 없을까, 몸의 변화 말고 보이지 않는 긍정적인 변화는 없을까. 건강하게 나이 드는 방법에 대해 스스로 매일 물었다. 생각의 끝엔 하나의 문장만 남았다. ‘그래, 그럴 수 있지.’
돌아보니 몇 년 전부터 좀처럼 화가 나지 않는다. 누가 좀 언짢은 말을 해도, 성가신 일을 당해도,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그럴 수(도) 있어’가 떠올랐다. 때론 바보처럼 보일 수 있지만 차라리 그편이 훨씬 좋았다. 그 사람 입장에서 짧으면 몇 초, 길면 1~2분 정도만 생각하고 나면 거짓말처럼 화가 나지 않았다. 목소리를 높여서 달라지지 않을 일이라면 굳이 화를 낼 이유도 없었고, 거친 말로 되받아치는 대신 웃으며 화를 내는 편이 더 나은 결과를 낳는다는 것도 알게 됐다. 굳이 따지자면 나이가 들면서 타인과 세상에 대한 ‘공감 능력’이 극대화됐다고나 할까.
이런 태도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온라인에선 통하지 않았다. SNS엔 화내야 마땅한 일들로 넘쳐나고, 미디어엔 소리치고 흥분한 사람들만 등장한다. 현대사회가 사람들 간의 연결을 기반으로 성장했지만, 지금은 그 기반이 무너질 위기에 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의 지구’에 산다는 자부심 뒤에서 SNS는 분열을 통해 수익을 거둔다. 부자가 되고, 젊어지고, 유명해지고, 되도록 많은 이들과 멋진 곳에서 어울리는 게 행복한 삶이라고 끊임없이 말한다. 다양한 의견과 다양한 사람이 모인 것 같지만 사실상 SNS에서 우리는 이쪽과 저쪽으로 나뉘고,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나뉘어 서로 다툰 일이 올해도 셀 수 없이 많았다. 고도화된 알고리즘은 그 왜곡된 생각을 한쪽으로 더 치우치도록 돕는다. 실제 미국에선 2009년의 사람들이 1979년에 살던 사람들의 75%보다 공감 능력이 더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공감이 진화의 열쇠였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육체적으로 가장 연약했던 사피엔스들은 수천 년을 거치며 다른 사람들과 쉽게 관계를 맺을 수 있게 진화했다. 얼굴은 부드러워졌고, 공격성은 줄었고, 근육은 감정을 더 잘 표현할 수 있게 됐다. 그러면서 발달한 공감 능력은 우리를 지구상 가장 친절한 종이 되게 했다. 남의 감정을 함께 느끼고 고통을 자기의 것인 것처럼 느끼며 그를 도울 때 나 스스로 도움받는 느낌을 받으며 지금의 세계를 만들었다는 얘기다.
중요한 건 공감 능력은 초능력도 아니요, 타고난 기질도 아니라는 것이다. <공감은 지능이다>를 쓴 자밀 자키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 교수는 공감은 기질보다 기술에 가깝고, 습관과 교육으로 얼마든지 진화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했다. 나이를 먹어가며 공감 능력이 더 발달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반가운 말인가.
오늘도 한 살 더 먹을 결심을 한다. 새해엔 SNS를 덜 하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 더 깊게 공감하는 것.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한 용기다. 이제 겨우 인생 중반에 접어들어 버릇없다고 생각하는 인생 선배들껜 고개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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