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퇴근 접고 나왔는데…또 다른 전쟁 치르는 택시기사들
택시대란 숨은 원인, 두 개의 전쟁 치르는 기사들
이 말은 택시기사 최승엽(60)씨의 필살기다. 경기도 고양시에서 6년째 개인택시를 모는 최씨는 “손님에게 최대한 호의를 베푸는 대답이자 나름대로의 영업전략”이라고 말했다. 그는 “저녁 시간대 취객과 시비 붙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그렇다고 모르쇠로 있으면 또 무시한다고 시비를 거니 운행 1년 만에 영업전략을 터득했다”고 밝혔다.
“좋은 말씀입니다.”
서울 H운수에서만 23년째 일하는 유종대(63)씨는 취객 대응 1단계를 발령한다. 취객의 말이 격해지면 2단계로 들어선다. “훌륭하십니다.” 유씨는 “칭찬해서 기분 나빠할 사람은 없다”며 “시간이 돈인 법인택시 기사에게 승객과 실랑이가 벌어져 경찰서로 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택시도 경쟁의 시대라, 살아남으려면 이렇게라도 해야 한다”며 바삐 떠났다.
택시기사는 이처럼 두 개의 전쟁을 동시에 치르고 있다. 취객과의 전쟁, 다른 택시와의 경쟁이다. 이 두 가지는 얽히고설켜 한 줄기다. 결국 생업의 문제다.
택시대란은 운행 대수 부족에서 비롯됐다. 필요한 시각, 필요한 장소에 택시가 모자란다. 시각은 오후 10시 이후 심야이고, 장소는 서울 종로와 강남역 같은 유흥가다.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승객 대부분은 취객이다. 많은 택시 기사들이 야간 근무를 피하는 이유다.
법인 기사, 코로나로 3년 새 3만 명 빠져
경찰청이 밝힌 올해 상반기 전국에서 발생한 운전자 폭행은 2167건. 지난해는 4259건으로 2020년 2894건에서 47% 늘었다. 올해도 4000건을 넘을 것으로 보인다. 이 중 주취 상태에서의 폭력은 매년 80% 안팎이다. 이용구 전 법무부 차관의 택시기사 폭행사건이 신고 건수를 늘렸다는 분석도 있다. 서울의 한 개인택시 기사는 “한 달에 다섯 차례 경찰서에 가기도 했다”고 말했다. ‘운전 중’인 기사를 폭행하거나 협박하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개인이든, 법인이든 택시 기사는 야간보다 주간 운행을 선호한다. 취객과의 마찰을 피하려는 게 한 원인이다. 최승엽씨도 “오전 8시 출근, 오후 6시 퇴근을 칼같이 지킨다”며 “몇만 원 더 벌려고 취객을 상대하고 싶지는 않다”고 밝혔다. 반면 유씨, 박씨 같은 법인택시 기사는 주간·야간 근무를 의무적으로 되풀이해야 한다. 유씨는 “특히 야간 운행 때는 간·쓸개 다 빼놓고 다니자는 말을 기사끼리 나눈다”고 말했다. 이 와중에 코로나19로 승객이 뚝 떨어지면서 택시기사들은 벼랑으로 몰렸다. 운행 시간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개인택시보다 법인택시가 받은 충격이 컸다.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12월 10만2330명이었는데, 올해 10월 7만3027명으로, 3만 명 가까이 빠져나갔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풀리고 승객이 늘면서 택시대란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정부는 총량제를 통해 택시 수급을 조절하고 있다. 업계에서도 “택시 대수는 모자라지 않다”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기사들은 밤이면 어디로 갔을까.
전문가들은 이미 수년간 지속한 택시대란의 원인으로 운행 대수 부족을 꼽아왔다. 카카오T를 운영하는 카카오모빌리티가 공개한 2022년 6월 택시 운행 패턴을 보면, 개인택시 운전자들은 오후 6시 이후 급격하게 운행이 줄어드는 패턴을 보였다. 서울연구원에 따르면 오후 10시~오전 4시에는 전체 개인택시의 33%만 운행한다. 법인택시는 같은 시간 56%가 나온다. 서울연구원은 택시대란의 주원인으로 이런 개인택시의 ‘조기 퇴근’을 지적했다. 단순한 운행 대수 부족이 아니라 특정 시간대, 특정 장소에서 택시 가 모자란 것이다.
눈이 펑펑 내린 지난 15일 오후 8시경. 운행 중인 개인택시가 줄어드는 시각이다. 서울 청량리역 근처에서 만난 법인택시 기사 신상훈(43·K운수)씨는 “법인택시는 시간 여유가 없기 때문에 개인택시처럼 역 앞에서 대기하지 못한다”며 서둘러 손님을 찾아 떠났다. 업계에서는 이를 ‘순환배회 영업’이라고 부른다. 유씨처럼 신씨도 “시간이 돈”이라고 말했다.
코로나19로 수입이 적어진 법인택시 기사들은 대리운전·택배·배달 쪽으로 빠져 나갔다. 신씨는 “3년 전 180명이었던 회사 동료가 100명으로 줄었다”고 밝혔다. 택시업계는 법인택시 가동률(면허대수 중 실제 영업 비율)이 60%에 그친다고 밝혔다. 취객 스트레스로 개인택시 기사는 심야 운행이 적고, 야간 운행의 버팀목이었던 법인택시 기사는 숫자가 줄었다. 심야 시간 운행 공백이 생겼다.
서울시는 지난 1일부터 심야시간 택시요금 할증을 올렸다(그래픽 참조). 국토교통부는 지난달 일정 기간 택시 운행을 제한하는 ‘부제’를 없앴다. ‘시간이 돈’인 택시 기사에게 ‘시간은 약’이 되도록 한 셈이다.
심야할증 인상 이후 맞는 사실상의 첫 ‘불금’은 지난 9일이었다. 금요일은 택시 수요가 가장 많은 요일이다. 첫 금요일 밤은 2일이었지만 그날은 한국의 월드컵 예선전이 열려 손님도, 운행 대수도 적었다. 서울시에 따르면 9일 심야시간대 택시 운행 대수는 2만8325대. 2주 전 금요일인 11월 25일보다 16.4%가 늘었다. 개인택시가 22%, 법인택시가 6.3% 증가했다. 취객을 피하던 택시들이 돌아와, 이날은 택시대란이 없었다는 평가다.
“택시대란 잡는다는데 택도 없을 것”
그러나 현장의 택시 기사들 판단은 조금 다르다. 개인택시 운전자인 신승교(60)씨는 “생각보다 많은 기사가 나와 손님들이 택시를 잡기가 순조로웠던 것 같았다”라면서도 “오히려 빈 택시가 많아 보였다”고 했다. 정진택(60·개인)씨는 “연말인데도 올해는 손님이 적고, 여기에 심야할증 요금 폭탄을 맞을 것 같다는 우려가 택시를 꺼리게 한 것 같다”고 밝혔다. 서울시는 택시 수급 조절에 필요한 실차율(운행시간 중 실제로 승객을 태우고 영업한 비율)은 공개하지 않았다. 서울시 관계자는 “실차율 분석은 시간이 걸린다”며 “보다 중요한 건 승객이 무리없이 택시를 잡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서울 강북의 S운수 관계자는 “획기적으로 수입이 늘지 않는 이상 택배, 배달로 전업한 기사들이 돌아올 가능성은 적다”는 전망도 했다. 법인택시에서 대리운전으로 갈아탄 김모(44)씨는 “글쎄, 벌이가 법인택시 몰 때보다 2.5배 더 들어오는데….”라며 말을 아꼈다. 개인택시도 심야에 다른 개인택시와의 경쟁이 심해지면서 공차로 돌아다니지 않으려다 보니 주간 운행으로 복귀하는 기사들이 많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한 택시 기사가 말했다. “승객 수는 정해져 있고, 취객은 여전할 것이며, 경쟁은 거세졌다. 택시대란 잡는다는데, 택도 없는 것 아니냐”고.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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