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튤립이 정강이를 간질인 듯 웃음이 터지는 술
오스카 와일드가 이 술을 마시면 술집 바닥에서 갑자기 튤립들이 자라나 정강이를 간질이는 듯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압생트다. 위트 넘치는 절묘한 말들을 남긴 사람답게 이 말에도 그만의 인장이 있다. 튤립이 태우는 간지러움은 어떤 느낌일까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압생트에 관련된 말이나 일화 중에 이 ‘튤립 간지럼설’이 가장 내 취향이다.
압생트에 대한 다른 말들은 너무 들떠 있거나 극적이라서 부담스럽다. 툴루즈 로트렉은 열락 상태의 무희의 춤에 곁들여 압생트를 찬양하는 그림을 그렸고, 압생트를 좋아하기로 유명한 반 고흐는 압생트를 그렸고, 아마 압생트를 마시며 그렸을 테고, 심지어 고흐가 귀를 자른 것은 압생트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고흐가 귀를 자른 일만큼이나 현란한 사건 사고가 압생트를 마신 후 벌어졌고, 압생트는 금지되기에 이른다.
백 년 가까이 그랬다. 70도가 넘는 고도주인데다가 압생트의 재료인 웜우드에 들어 있는 성분이 신경을 마비시키고 환각을 보게 한다는 주장이, 무수한 사고들에 더해져 그랬다. 압생트를 다시 만들 수 있게 된 뒤 잊혔던 신비의 그 술을 만들겠다고 나선 사람들의 면면도 재미있다. 그중 한 분이 마릴린 맨슨인데, 압생트 브랜드를 출시하면서 반 고흐를 오마주한 광고를 제작하기도 한다. 등등의 이런 이야기들이 너무나도 많다.
압생트가 사라졌던 동안 압생트를 대체한 술이 있었다. 파스티스. 금지된 웜우드가 아닌 다른 약초들을 넣고 40도쯤으로 비교적 약하게 만든 술이 파스티스다.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 설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프랑스에서 와인 다음으로 많이 먹는 술이 파스티스라고 한다. 프랑스어 사전에 파스티스를 검색하면 나오는 예문들을 보면 정말 그런가도 싶다. “모든 마르세유 사람은 파스티스를 마셔요.” “프랑스에서 파스티스가 유명해요.”
마르세유에서 만들어진 술이 파스티스라 그럴 것이다. 파스티스 중 유명한 브랜드인 리카(Ricard)도, 페르노(Pernod)도 모두 마르세유 산이다. 노르망디의 술이 칼바도스라면, 마르세유의 술은 파스티스다. 나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아니 에르노의 부모는 노르망디 지역의 소도시에서 잡화점을 했다는데, 그의 소설에도 파스티스가 나온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위층에 누워 있는데 아래층에서 어머니는 여전히 파스티스와 와인을 팔고 있었다는. 본인이 겪은 일만을 소설로 쓴다는 작가이기에 아마 실제로 그랬을 것이다.
이 책을 처음 읽었던 2012년의 나는 파스티스에 밑줄을 긋고 물음표를 적어두었는데, 2022년의 나는 파스티스를 안다. ‘모방한다’라는 뜻을 가진 파스티슈(pastiche)에서 파스티스(pastis)라는 이름이 왔다는 것도. 파스티스가 모방을 하는 대상은 당연히 압생트고. 파스티스는 프랑스에서 압생트가 판매 금지된 이후 마르세유에서 만들어져 마르세유를 넘어 전국적인 인기를 얻었다.
압생트나 파스티스나 프랑스적인 술이다. 프랑스의 국민 음용주 같은 느낌이랄까. 아니스, 회향, 리코리스 같은 게 혼합된, 약초와 허브 맛이 강하게 나면서 거의 입안에서 폭발하다시피 하는 초록색 술을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좋아할 수 있는지 신기하다. 허브와 온갖 향신료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축복 같은 술이지만 오이 이상으로 호불호가 강한 것들로만 이루어진 술이 대중적일 수 있다니. 리코리스(서양 감초라고들 한다) 사탕이나 아니스 사탕을 줬더니 그런 걸 먹느냐며 인상을 찌푸렸던 독일 사람 몇몇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궁금해지는 것이다. 맛이란 뭘까. 맛있음과 맛없음이란 뭘까라고.
며칠 전 파스티스를 사러 갔었다. 나 역시 압생트를 모방할 술이 필요했기 때문에. 집에 있던 압생트를 어딘가로 보내서 그랬다. 지난번 ‘밤은 부드러워,마셔’를 쓰면서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압생트에 미치고,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은 칼바도스에 미친다는 소리를 들었다는 문장을 적고는 압생트를 따라 마셨다. 내게 압생트가 있었다는 게 떠올랐던 것이다. 형광 초록색의 그 술은 아주 독하고 달면서 짙은 민트 향이 났다. 원액을 약간 마신 후, 물을 타서 마셨다. 형광 초록색이 물에 풀리면서 이국적인 어느 나라의 바다 색이 났다. 아마도 모로코?
보내기 전의 이별 의식이었다. 압생트를 보내고 나니 파스티스가 마시고 싶어졌다. 여러 번 마셔보았고, 종종 생각했던 그 술이. 그래서 파스티스를 사러 갔다. 사람들이 그리 많이 마시지 않을 듯한 이런 스피릿을 살 때는 남대문으로 간다. 남대문시장의 대도종합상가에 모여 있는 주류상으로. 리카나 페르노, 또 주류상에서 보유하고 있는 파스티스 중에서 느낌이 오는 걸로 고르려고 했었다. 그런데 웬걸… 리카도 없었고, 다른 파스티스도 딱히 없었다. 페르노만 있었다. 그것도 딱 한 가게에만. 생각보다 더 반도의 술꾼들이 찾지 않는 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페르노와 같이 산 다른 스피릿을 들고 나오며 페르노가 있는 것만도 얼마나 다행인가라는 생각이 들었고. 외국에 나가지 않고서는 페르노를 마시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임을 알게 되었다.
오랜만에 마시는 파스티스는 내 기억 속의 파스티스와 달랐다. 압생트와 거의 색이 비슷한 형광 초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몽딸로였나 싶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서 몽딸로(menthe à l’eau)와 헷갈렸을 수도 있다. 민트 시럽에 스틸 워터나 탄산수를 타서 먹는 음료가 몽딸로다. 파리에 있는 한 달 내내 그걸 마셨다. 거의 모든 테이블에서 그걸 마시고 있는데, 빛을 투과해서 영롱하게 빛나고 있는 그 초록색들을 보다 보면 저걸 달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잔에 따른 페르노는 형광 연두색에 가까웠다. 압생트의 형광 초록이 투명한 쪽이라면, 페르노의 형광 연두는 불투명한 쪽이라는 것도 달랐고. 압생트는 물에 타면 형광 초록의 형광기가 빠지면서 모로코 바다(?) 색이 되었는데 페르노에 물을 탔더니 레모네이드와 비슷한 색이 되었다. 레몬을 짜서 만든 레모네이드가 아니라 레모네이드 가루를 타서 만드는 그런 유사 레모네이드의 색이.
어떤 시각으로 보아도 색깔은 압생트보다 못했다. 압생트의 초록색을 보고 있으면 왜 그렇게 파리의 예술가들이 ‘초록 요정’이니 ‘초록의 시간’이니 하며 압생트를 신비화했는지 알 듯한 기분이 드는데, 페르노는 좀… 페르노를 좋아할 수는 있어도 페르노의 색은 좋아할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미국의 시인 메리 루플은 ‘나의 사유 재산’에서 페르노를 이렇게 묘사한다. “색이 너무 선명해서 마치 방사능을 발산하는 듯 보이는 술. 페르노, 그것은 페르노였다.”
방사능을 발산하는 듯 보이는 술에 물을 타면 레모네이드가 된다니, 이것은 기적인가 유머인가 생각하며 그 불투명한 레모네이드를 마셨다. 웃음이 나오는 술이라니, 좋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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