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얇은소설] 마술사를 만난 적이 있다

2022. 12. 16.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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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순간을 소환’하는 글의 힘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란 말의 뜻은

우밍이, <육교 위의 마술사>(‘햇빛 어른거리는 길 위의 코끼리’에 수록, 허유영 옮김, 알마)

나는 천구백육십년대 거의 끝자락에 태어나 지금은 사라진 산동네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동네엔 구불구불한 좁은 골목이 많았고 온종일 어른들이 싸우는 소리, 음식 냄새, 서로의 이름을 불러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가끔 웃음소리나 박수 소리가 들릴 때도 있었다. 옷을 입힌 원숭이를 데려와 묘기를 보여주는 사람이 동네에 오는 날이 그랬다. 나는 동생들 손을 꽉 잡고 둥그렇게 모인 사람들 틈을 파고들어 원숭이가 사람처럼 북을 치고 춤을 추는 모습을 뚫어지게 보다가 원숭이 주인이 마침내 모자를 벗어들곤 구경꾼들에게 돌릴 때는 뒷걸음질 치며 물러나곤 했다. 이상한 일이지만 최근 들어서 아무 이유도 없이 문득문득 그 순간이 떠오르곤 한다. 춤추는 원숭이를 보며 느꼈던 슬픔도.
조경란 소설가
우밍이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내용과 전혀 상관이 없는데도 나는 그러한 유년의 기억을 맞닥뜨리게 된다. 추천사를 쓴 대만 작가의 말처럼 그의 소설은 “사라진 순간을 소환하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일까.

‘육교 위의 마술사’의 초점 화자인 ‘나’는 아직 열 살도 안 된 어린아이다. 신발 가게를 하는 부모가 나에게 육교 위에서 신발 끈과 깔창을 팔아보라고 시켰다. 어린애가 팔면 사람들이 더 사줄지 모르니까. 소설의 공간이자 지금은 철거된 중화상창(中華商場)은 타이베이의 상가 건물로 예전 세운상가와 비슷한 곳이라고 한다. 다리가 연결돼 있어 3층짜리 상가 여덟 동을 차도를 건너지 않고 오갈 수 있으며 헌책방, 구둣방 등 각종 상점이 있고 육교 위에도 노점상들이 모여 있었다. 나도 그 육교의 쇠 난간에 신발 끈을 묶어두곤 장사를 시작했다. “어쨌든 나는 육교 위에서 신발 깔창 파는 일을 아주 좋아했다.”

어느 날부터 맞은편 자리에 깃이 달린 재킷에 잿빛 바지를 입은 남자가 자리를 잡고 마술 도구를 늘어놓고 팔았다. 자신을 마술사라고 소개한 그는 한 시간에 한 번씩 육교 위에서 마술을 보여주었다. 나와 그 또래의 아이들에게 마술사는 신비로운 사람에 가까워 보였다. 구경꾼들이 몰려들었고 그가 같은 숫자가 나오게 하는 주사위 마술, 비었다가 갑자기 꽉 차는 성냥갑 마술을 보여주고 날 때마다 마술 도구들도 덩달아 팔렸고 나도 유혹을 이기지 못하곤 신발 깔창을 팔아 번 돈으로 도구를 샀다. 그러나 나의 마술은 번번이 실패했다. “세상에는 직접 해봐야만 속았다는 걸 깨닫는 일들이” 있으니까. 그러나 마술사는 나에게 말했다. 내 마술은 속임수가 아니라 진짜란다.

검은 종이에서 오려낸 사람 인형으로 춤을 추는 마술을 보여준 뒤로 마술사는 육교의 명물이 되었다. 그가 종이 인형을 나에게 맡기고 화장실에 간 사이 폭우가 내려 그만 얇은 인형의 손이 잘리고 말았다. 구경꾼들에게 즐거움을 주던 종이 인형이 자신의 잘못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한 나는 흐느껴 울었다. 자신의 마음도 원래 종이로 만들어졌던 것처럼 구멍이 뚫려버렸다고 느끼며.

이제 개학을 앞둔 나를 마술사는 자신이 사는 옥상의 기계실로 데려갔다. 침낭과 비닐봉지들 사이에 수북이 쌓인 책들. 그리고 마술사 남자는 마술의 비밀을 궁금해하는 나에게 어떤 것을 보여준다. 오른손 안에 든 그것을. 그 전에 마술사 남자는 나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세상에는 우리가 영영 알 수 없는 일들이 있으며 사람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마술사는 누구였을까? 몇 년 전에 이 단편을 처음 읽었던 때는 하지 않았던 질문을 이제 하게 됐다. 소년을 자신이 사는 공간으로 데려간 날, 마술사는 소년에게 나비와 나비의 표본에 관해 알려주었다. 우밍이의 또 다른 아름다운 책 ‘나비 탐미기’가 떠올라서인지, 나는 이 마술사는 어쩌면 소설가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하게 되었다. 마술사도 소설가도 ‘다른 눈’을 갖고 있어야 하며 “뭘 보여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니까. 사라진 순간을, 잊었다고 생각한 기억을. 성장의 과정에서 우리가 지나오고 슬픔과 행복을 느끼며 관통해온 빛나는 순간들. 그러니까 소환해야 하는 나와 타인의 잃어버린 순간들을 말이다.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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