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헤어지고 나서 결심하자
그때 필요한 것이 과감한 ‘체념’
한 해의 미련 이제 다 떨쳐내고
새로운 포부를 품을 준비 해볼까
이번 연말에 크리스마스 캐럴 대신 반복해서 틀어놓는 노래는 ‘Ruined Heart’다. 우리말로 바꾸면 ‘망가진 마음’쯤 된다. 제목에서 풍기는 패배적 분위기와는 달리, 음악을 들어보면 흥겨울 뿐 아니라, 뭔지 모를 후련한 느낌까지 든다. 이 음원을 광고에 끌어 쓴 중고차 판매 대행사는 “헤어지자, 두려움 없이”라는 카피를 화면에 띄운다. 헤어짐에 대해 가지고 있던 평소의 힘겨움을 비웃는 듯하다. 올여름 봤던 ‘헤어질 결심’이라는 영화 제목과는 의미가 대조적이다.
나는 반려견이 있는데, 다른 개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우리 개는 헤어짐의 의식을 치르는 일이 없다. 가족이 자기를 두고 외출해버리는데 뭐가 신난다고 배웅을 나오겠는가. 대신 저녁에 돌아올 때는 현관까지 마중 나와서 꼬리를 흔들고 거실을 세차게 뛰어다니며 성대하게 환영해준다. 사람과 개는 반대다. 사람은 무엇이 자기에게서 사라지려 할 때 그제야 이게 아닌데 싶어 시간을 끈다. 헤어질 이유를 찾아 결심하고 헤어지는 시늉만 여러 차례 하면서 제자리에서 질척거린다. 사실 헤어짐에 필요한 것은 결심이 아니라 체념(諦念)이 아닐까.
이쯤 다시 노래 제목 ‘Ruined Heart’ 이야기를 끌어내자면, 모범생다운 규범과 바람직한 질서에서 벗어나 있을 때 우리는 망치고 망가졌다고 한다. ‘Ruined’는 퇴폐적으로 쇠락했다는 뜻이므로, 더 이상 순수하지 않고 닳고 닳은 데다 오염되어 부패한 상태와 관련되어 있다. 지속가능하지 않고, 지레 빨리 수명을 다하리라는 부정적 암시도 준다. 이런 단어에 어울리는 것이 체념이다.
나는 체념의 모순성을 좋아한다. 애초에 세운 장엄한 계획이 뒤틀어지고 노력이 수포가 되면 마음 깊은 곳에서 체념이 싹튼다. 체념은 언뜻 ‘포기’처럼 들리지만, 거기에는 ‘깨달음[諦]’이란 글자가 들어 있다. 무모한 이상을 목표로 사느라 결실 없이 지내는 게 아니라, 주위 현실을 살펴보며 전부 다 해낼 수 없음을 수긍하는 지혜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체념을 구성하는 것은 8할이 자기 정당화이지만, 포부도 덤으로 끼어 있다. 연말에 특별히 권하고 싶은 감성이 바로 체념이다. 한 해가 열흘 남짓 남았을 때는 미련을 다 떨쳐내고 당장 할 수 있는 정도로만 절충해서 마무리할 용기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루어내는 성과의 다수는 체념 상태에서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 내 경우는 글쓰기가 그렇다. 괜찮은 글을 쓰겠다고 결심하면 도무지 써지지 않는데, 체념해 버리면 무슨 내용이든 채워져 있다. 우스운 건, 이번엔 어쩔 수 없으니 이 정도로 제출하고, 다음번엔 꼭 상큼한 주제로 써봐야지 하는 포부를 품는다는 것이다.
망가짐이란 이제 곧 다른 차원의 모험이 시작되리라는 예고와 같다. 모든 것이 끝나버린 듯한 12월이지만 어쩌면 이것저것 체념한 지금이야말로 연중 가장 의욕적이고 생산적인 시기일지도 모른다.
이주은 건국대 교수·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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