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분 무대예술로 재탄생한 '대한제국 마지막 궁중잔치' [송태형의 현장노트]
120년전 궁중잔치 '내진연' 재현
고품격 궁중 가무 잇따라 펼쳐져
권위적인 의례 비중 높아 아쉬워
관객이 볼 때 세로로 긴 직사각형 무대 맨 앞에 황제의 평상이 자리합니다. 황후가 앉는 자리와 황제의 시중을 드는 상궁 등이 위치한 앞 공간과 무용와 의례가 펼쳐지는 가운데 공간 사이에 주렴(붉은 대나무 발)이 놓이고, 가운데 공간과 음악을 연주하는 악단이 자리한 뒤 공간 사이에도 주렴이 처져 있습니다. 천장에는 하얀 차일이 드리워졌고, 사방에는 황실을 상징하는 황색 휘장이 둘러쳐져 있습니다. 마치 1902년 12월 3일(음력 11월 8일) 덕수궁 관명전 뜰에서 열린 궁중잔치 ‘임인진연(壬寅進宴)’ 중 내진연의 모습을 기록한 궁중 기록화(아래 그림)를 무대에 재현한 듯합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궁중잔치가 100분짜리 무대 공연으로 재탄생했습니다. 16~21일 본 공연을 앞두고 지난 15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열린 송년공연 ‘임인진연’(연출 박동우)의 전막 시연회 현장입니다.
임인진연은 1902년 임인년에 고종이 왕위에 오른 지 40년과 나이 60을 바라보는 망륙(望六)인 51세를 기념하기 위한 행사였습니다. 진연은 궁중에서 베푸는 잔치를 뜻합니다. 급변하는 개화기에 대외적으로는 황실의 위엄을 세우고 대내적으로는 군신의 엄격한 위계질서가 드러나는 국가적 의례를 통해 자주 국가 대한제국을 과시하기 위해 행해졌다고 합니다. 조선 왕조 500년과 대한제국 시기의 마지막 궁중 잔치로 역사에 기록된 행사입니다.
국립국악원은 그로부터 120년 후인 올해 임인년을 맞아 자주국가를 염원한 임인진연의 문화적 가치와 역사적 의미를 되짚어 보기 위해 공연을 기획했습니다. 김영운 국립국악원장은 “궁중잔치는 당대에 가장 화려하고 세련된 음악과 무용을 선보이는 자리”라며 “찬란한 궁중예술을 복원하고 소개하는 작업은 국립국악원이 해야 하는 일이자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임인진연은 오전 9시부터 황제와 남성 신하들이 참석해 공식 행사 성격을 띠는 ‘외진연’, 황태자, 황태자비, 황실 종친 등과 함께 예술과 공연을 즐기는 ‘내진연’과 야진연, 익일 회작과 익일 야연 순으로 온종일 거행됐다고 합니다. 이번 공연 연출가인 박동우에 따르면 대한제국 정전인 중화전 뜰에서 행해진 외진연이 공식적이고 남성적인 행사라면 내진연은 예술적이고 여성적인 행사로 관명전 뜰에서 행해졌다고 합니다. 보다 많은 277인의 정재여령(여자무용수)이 출연했고 행사진행요원 300명도 모두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국립국악원이 이번 공연에서 재현하는 것은 예술적인 성격이 강한 ’내진연‘의 축약형입니다. 공연장인 예악당 무대는 실제로 내진연이 행해진 관명전 뜰의 절반 크기라고 합니다. 출연 인원도 실제보다 대폭 축소해 국립국악원 정악단과 무용단, 객원 연기자 등 모두 150명이 무대에 오릅니다. 1902년 의례와 비교했을 때 규모를 6분의 1 정도로 축소했습니다. 음식을 올리는 절차를 생략했고 등장하는 춤을 29가지에서 5가지로 줄였습니다. 공연 시간은 100분입니다. 박 연출가는 "진연의궤와 임인진연도병 등 임인진연을 기록한 유산을 바탕으로 창작보다는 재연에 중점을 하는 데 중점을 뒀다”며 “당시 규모에는 못 미치지만, 최대한 그때 분위기와 정서를 살리려고 했다"고 했습니다.
공연에서 달라진 점 중 하나는 황제의 위치와 존재입니다. 120년 전에는 높이 쌓은 단상 위에서 공연을 굽어볼 수 있는 자리에 위치했다면 이번 황제의 자리는 무대와 평평한 맨 앞입니다. 황제도 실제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무대보다 높은 객석에 앉은 관객이 황제의 시선으로 공연을 보는 셈입니다. 김 원장은 “황제의 국가인 대한제국에서 국민의 국가인 대한민국이 된 만큼 관객 여러분이 황제의 자리에서 공연을 볼 수 있도록 한 의미”라고 했습니다.
공연은 황태자와 황태자비, 영친왕, 군부인, 우명부(척신부인), 종친 순으로 황제에게 술을 올리는 진작(進爵) 의례와 진작 의례 전후와 사이에 연주하고 춤추는 음악과 무용으로 구성됩니다. 황제가 입장할 때 음악 ’보허자‘가 연주되고, 정악단의 ’낙양춘‘ 연주에 맞춰 무용단이 우아하고 절제된 아름다움이 빛나는 ’봉래의‘를 춥니다. 이어 음악 ‘수제천’이 흐르는 가운데 황태자의 진작 의례가 치러지고, 음악 ‘해령’에 맞춰 무용 ‘헌선도‘를 춥니다. 이런 식으로 진작과 음악, 무용이 이어진 후 마지막으로 무용 ’선유락‘이 화려하게 펼쳐진 후 예식이 끝났다는 예필을 선포하고 보허자가 다시 흐르는 가운데 공연이 마무리됩니다.
100분의 공연 시간 중 진작을 비롯한 의례의 비중이 높습니다. 관객이 보기에 크게 다르지 않은 진작 의식이 여섯 번이나 반복되다 보니 단조롭고 지루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프로그램북을 살펴보니 중간에 좌명부(종친 부인) 진작과 일부 퇴주와 치사 의식을 생략했음에도 그랬습니다. 또 의식 때마다 진작자와 황후를 비롯한 연기자들이 황제(객석)을 향해 큰절을 올리는 의식이 반복됩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대여섯 차례 같은 연기자의 큰절을 받아야 하는 관객은 부담을 느낄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황제의 시선에서 당대 최고 수준의 궁중 무용과 음악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아무리 퍼포먼스라고 해도 ‘제국’이 아닌 ‘민국’의 시대에 당대 위계질서와 위엄을 세우기 위한 권위적인 의례에 따라 황제가 받은 칭송과 절을 반복해서 받다 보니 불편하고 민망해졌습니다. 역사를 재현하는 퍼포먼스일 뿐 아니라 송년 공연을 내걸고 가족 관객 등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무대인 만큼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이 공연의 가장 큰 장점과 가치는 그동안 개별적으로 행해진 궁중 무용과 음악을 과거에 궁중에서 실제로 행해진 환경과 비슷한 맥락에서 같이 감상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국악원 관계자는 “그동안 각각의 궁중음악과 무용을 개별 무대를 통해 선보인 적은 있지만 진연 절차로 묶어 하나의 무대에 올리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무용은 봉래의를 시작으로 ‘헌선도’ ‘몽금척’ ‘향령무’에 이어 선유락으로 끝납니다. 음악은 해령, 본령, 수제천, 여민락, 계면가락도드락 등이 연주됩니다. 화려한 ‘궁중 잔치’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힘들여 그럴싸하게 재현한 궁중 무대에서 딱딱한 의례보다는 춤과 음악이 결합한 품격 높은 예술을 보다 많이 보고 싶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공연이었습니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toughl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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