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태운 청바지에 그린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화폭

김슬기 기자(sblake@mk.co.kr) 2022. 12. 16.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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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 개인전
1월 말까지 국제갤러리 K3
불태운 청바지와 재로 작업한
‘역사 회화’ 등 평면작업 선보여
“재는 죽음이자 모든 것의 귀결”

말라버린 논처럼 쩍쩍 갈라진 검은 흙바닥이 발길을 붙잡는다. 불에 타버린 재로 채워진 집 같다. 국제갤러리 K3의 바닥에는 작가의 기도문이 부조(浮彫)로 새겨졌다. 10여년 전 TV쇼 ‘히어로즈’에서 인용한 문구다.

“태초에 발견이 있었다/ 잠을 방해하는 새로운 악몽/ 혼란에 질서를 부여할 필요/ 우리는 외면당한 기도를 통해 이 세상을 만들어 나간다./ 격변 너머에 광휘 있고/ 통합에 대한 향수/ 애도의 땅에서/ 공기에, 잡을 수 없는 것에, 당신을 맡긴다/ 유령은 갖지 못한다, 아무것도”

태초에 ‘빛’이 아닌 ‘악몽’이 있었다는 선언은 작가의 말처럼 ‘신성모독’에 가깝다. 하지만 예술가에게 금기는 있을 수 없다.

눈을 들면 불에 그을린 듯한 회화 10여점이 걸렸다. 2012년 시작된 그의 대표작 ‘역사 회화’ 연작은 청바지를 표백해 캔버스로 삼고, 청바지를 불에 태우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다시 캔버스에 쌓아 올렸다. 부감(俯瞰)하는 카메라의 시점은 인간을 바라보는 신의 시점이기도 하다. 타고 남은 재도 다시 재료로 사용됐다. 재와 물감과 사진이 결합한다.

“재는 죽음의 다른 이름입니다. 불이 타면서 연소되면 모든 것은 재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국제갤러리 K3에서 태국 출신 작가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37)의 개인전 ‘이미지, 상징, 기도’가 내년 1월 29일까지 열린다. 올 가을 아트선재센터 개인전에 이어 국제갤러리 전속작가로는 첫 전시다. 영상, 퍼포먼스, 회화, 설치 등을 넘나드는 작가는 전시장 전체를 제의(祭儀)의 장소로 꾸몄다. 개막일인 15일 만난 작가는 “역사 회화에서 쓴 불이라는 물성은 지난 10년간 계속해 사용해 왔다. 영상 없이 전시되는 첫 전시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방콕과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그는 베네치아 비엔날레(2019), 광주 비엔날레(2021)에 참여했고 뉴욕 휘트니미술관, 런던 테이트모던 등에 소장된 작가다. 올해 발표된 ‘아트 리뷰’의 미술계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중 88위로 이름을 올렸다. 프리즈 서울에선 여러 부스에서 전시되며 국제적 인기를 증명했다.

그의 작품에서 불과 재는 순환하는 우주의 관점에서 한 몸이다. “재는 우리 이전에도 존재하고 우리 이후에도 존재하는 뭔가 시간이나 차원을 벗어난 존재입니다. 모닥불 주위로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하잖아요. 인간이 불을 감싸곤 하지만 이곳에선 여러분을 불이 감쌉니다.”

재료로 사용되는 청바지도 특별한 의미를 내포한다.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세계화와 우리의 관계성을 잘보여주는 재료라 선택됐다. 작가는 “청바지는 서구 자본주의의 상징이기에 그걸 불태워버리면 상징성이 있다”면서 “동료들과 캔버스에 그림을 그릴 때 비서구권 작가가 서구권으로 들어간다는 뜻에서 서구의 역사로 들어간다고 말하곤 했다”고 설명했다.

회화를 장식하는 마지막 도상은 날개를 단 천사의 이미지다. 작가는 “천사는 제게 있어서 하늘과 땅의 연결고리를 의미합니다. 재료인 금박(foil)은 태국의 황금빛 신전이나 사원을 상징한다”고 덧붙였다.

2점이 걸린 신작 ‘빈 공간(하늘 회화)’에선 푸른색 여백이 거대한 화폭을 점유한다. 작가는 “빈 공간을 통해 뭔가를 투사할 수 있는 용도로 사용하고 싶었다. 블루스크린처럼 새로운 이야기가 창조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동양인 작가로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정체성’은 오랜 시간 천착한 주제였다. 그의 작업에서 모든 것을 불로 태우는 재가 만들어지는 여정은 그대로 회화의 주제가 된다. 생과 사가 공존하는 신전 같은 전시장에서 그는 말했다. “서양적 사고는 주제와 과정을 분리합니다. 이런 구분 짓기는 동양 작가에게 딜레마예요. 저에게 주제와 과정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동양에서는 영성과 애니미즘(정령신앙)이 서구보다 훨씬 더 제국주의, 아픔, 한 같은 정치적 이해를 많이 내포하고 있어요. 영성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입니다.”

‘역사 회화’ 앞에 앉은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 [사진 제공=국제갤러리]
‘빈 공간(하늘 회화)’ 앞에 선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 [사진 제공=국제갤러리]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 전시 전경 [사진 제공=국제갤러리]
‘Who will testify to the time when the world was ablaze’ [사진 제공=국제갤러리]
‘You who wish to find prayers, look for it in the ashes’ [사진 제공=국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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