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프랑스가 품고 서울이 낳은 니치향수의 아버지 “내 자신이 사랑스러워 지는 향을 찾아라”
뷔르탱, 15년간 LVMH 수석연구원 근무... 디올, 겔랑 등 향수 설계
퐁텐, 세계적인 향기 연구 기관 오스마테크 현직 회장
향기는 기억을 품는다.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느껴지는 샴푸 향에 첫사랑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고, 군고구마 굽는 향이 코에 스칠 때야 ‘겨울이 왔구나’를 체감하는 사람도 있다.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는 이야기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Proust)는 어느 겨울날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를 한입 베어 문 바로 그 순간, 수십년 전 고향에서 숙모가 내어줬던 마들렌 향기를 떠올렸다.
그 기억은 그의 대표작이자 모더니즘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작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집필로 이어졌다. 과학자들은 이 이야기에 빗대 과거에 맡았던 향기가 문득 그 때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일을 ‘프루스트 현상’이라고 부른다.
도시마다 품은 향이 다릅니다.
도시가 가진 향은 주로 그 지역 음식과 관련이 많습니다.
파리는 이를테면 구운 닭고기 향이 많이 납니다.
뉴욕에서는 프레첼, 독일에서는 사워크라프트(양배추 절임)와 맥주 향을 강하게 느낍니다.
서울은 한라봉의 상큼함, 경복궁 대들보에서 느껴지는 오래 된 나무 향이 인상적이네요.
토마스 퐁텐
‘향수의 본고장’ 프랑스에서 조향(調香) 전문가들이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주제로 한 니치향수를 선보이기 위해 서울을 찾았다.
니치향수란 틈새를 뜻하는 니치(niche)를 붙인 말로, 소수를 위한 프리미엄 향수를 말한다. 초기에는 고급 원료로 소량 생산하는 향수를 의미하다, 이제는 샤넬·디올 같은 고급 패션 브랜드가 아니라 향수만 전문으로 만드는 브랜드에서 내놓는 고가 향수를 일컫는 말로 쓰인다.
이번에 서울을 방문한 프레데릭 뷔르탱과 토마스 퐁텐은 15일 첫선을 보인 니치향수 브랜드 ‘엉트르두(ENTRE D’EUX)’의 두 아버지다.
‘엉트르두’는 프랑스어로 ‘그들의 사이’라는 뜻이다. 엉트르두는 우리나라 브랜드지만, 조향과 제품 생산은 프랑스에서 했다.
지난 2년 동안 팬데믹으로 엉트르두가 말하는 ‘그들의 사이’를 유지하기가 어렵지 않았냐는 첫 물음에 뷔르탱은 “마스크를 쓴 덕분에 이전보다 향을 맡고 싶은 욕구가 더 커졌다”며 “향수가 삶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다시 되돌아 볼 수 있던 2년”이었다고 말했다.
알다시피 프랑스 사람들은 볼을 비벼 인사를 합니다.
하지만 마스크를 낀 2년 동안 이렇게 인사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 볼이 떨어진 틈을 향수를 뿌려 채웠습니다.
‘내가 왔다’는 인사를 대신할 매개체로 향을 쓴 거죠.
프레데릭 뷔르탱
퐁텐은 “마스크를 쓰는 동안 맡기 어렵던 향들이 마스크를 벗는 순간 이전보다 더 강하게 느껴진다”며 “코로나 감염 대표적인 증상 가운데 하나로 ‘후각 상실’이 꼽히자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후각의 가치’가 높아졌다”고 거들었다.
뷔르탱과 퐁텐 두 사람 모두 향에 인생을 바친 ‘향 전문가’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맡은 역할은 분명히 다르다.
뷔르탱은 베르사유 조향 학교를 졸업한 후, 15년 동안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 그룹 수석연구원으로 일했다. 수많은 향수 브랜드에서 브랜드 이미지에 맞는 향을 설계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이 역할을 ‘프래그런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다시 말해 새로운 향을 만드는 감독이라고 표현했다. 현대적인 느낌을 강조하는 남성 화장품 브랜드라면 그에 맞춰 지적이고 세련된 콘셉트에 맞춘 향으로 제품 밑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퐁텐은 고전적인 조향사다. 그는 유럽과 미국 등 전 세계에 걸쳐 여러 향수를 직접 만들었다. 세계적인 향기 연구 기관 오스마테크 현직 회장이기도 하다.
뷔르탱이 전체적인 얼개를 짜면 퐁텐은 그 설계도에 맞춰 여러 향료를 조합해 실제 향수를 만들어낸다. 뷔르탱이 각본을 쓰는 영화감독이라면, 퐁텐은 카메라를 잡는 촬영감독에 가깝다.
둘은 이처럼 향수가 단순히 이 재료 저 재료를 섞어 만드는 액세서리가 아니라, 영화나 교향곡처럼 기승전결이 있는 하나의 작품이라고 강조했다.
전 세계가 팬데믹으로 발이 묶였던 지난 2년 동안 뷔르탱과 퐁텐은 철저히 단절된 채 향 만들기에 전념했다. 한국에 있던 이연경 엉트르두 대표와는 화상으로 대화를 나눴다. 서로 직접 만날 수 없던 가운데 그들은 관계를 갈구하는 인간 내면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에 주목했다.
이연경 엉트르두 대표는 “향수라는 물질 자체는 그저 화학 물질과 천연 향료를 결합한 것에 그치지만, 이 대조적인 물질을 사용해 역설적으로 조화로운 관계를 구성하고 싶었다”며 “낮과 밤의 내 모습이 다르고, 회사에서 나와 집에서 내가 다르듯 내 안에도 여러 내 모습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향으로 표현했다”고 말했다.
엉트르두는 ‘내 안의 대조적인 자아’를 주제로 한 3부작 서정시다. 뷔르탱과 퐁텐은 바깥으로 드러나는 나의 모습, 내면에 간직한 나만의 자아, 이 둘이 적절하게 섞인 현재의 내 모습을 세가지 향으로 나타냈다.
이 대표가 본인 생각을 뷔르탱과 퐁텐에게 설명하면 뷔르탱은 그 단어를 옮겨 적고, 도형으로 그렸다. 둥근 선과 직선을 적절히 섞은 시각적인 이미지가 완성되면, 퐁텐은 추상적인 그 그림을 여러 향료를 골라 향으로 풀어냈다. 그야말로 ‘향으로 그린 그림’인 셈이다.
누군가 피카소에게 그의 작품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자, 피카소는 ‘중국어를 배우지 않고 어떻게 중국인과 대화할 수 있느냐’고 대답했다고 한다.
추상적인 그림을 어떤 향으로 써내려 갈지 결정하려면 최소한 어느 정도 시간을 들여서 후각 훈련과 조향 훈련을 해야 한다. 여기에 상상력과 열정을 더하면 향수가 만들어 진다.
토마스 퐁텐
뷔르탱과 퐁텐이 만든 세가지 향수 가운데 첫 향수 ‘베르트 그레즈’를 열자 스카치 위스키에서 나는 강렬한 참나무통 향과 카라멜향이 느껴졌다. 검붉은 구리 증류기를 쓰는 스코틀랜드의 위스키 증류소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밍크 코트를 입은 여성이 떠올랐다.
퐁텐은 “야성적이면서도 상쾌한 느낌을 시나몬과 머스크 향으로 표현했다”며 “내면에 숨겨둔 다양한 모습을 두려움 없이 표현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향수”라고 말했다.
두번째 ‘쿰바 플로스’에서는 이국적이라는 느낌이 밀려 들었다. 이 대표는 “아프리카 전통 의례에 쓰이는 식물 카로 카룬데를 핵심 향료로 사용했다”며 “진취적이고 외향적인 내 모습을 상징하는 향”이라고 말했다.
마지막 비터 비테는 내 안의 나와 내 밖의 나 사이에서 균형을 이룬 ‘현재의 나’를 위한 향수다. 핵심 원료로 가이악 우드를 사용했다. 가이악 우드는 중세 유럽에서 ‘생명의 나무(lignum of vitae)’라 불리며 치유제로 쓰였다. 이 향수에서도 강렬한 나무 향을 바탕으로 하는 역동적인 에너지가 느껴졌다.
퐁텐에게 향수가 본래 가진 향을 제대로 느끼는 법을 물었다. 그는 “향수를 시험삼아 맡아 볼 때 시향지 끝 부분을 살짝 잡고, 잡은 부분에서 가장 먼 쪽에 향수를 딱 한 번만 뿌려라”고 말했다. 일상 생활을 하는 동안 사람 손에는 여러 냄새가 배어든다. 이 냄새가 시향에 개입하면 정확한 향수 향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는 또 “절대 코에 시향지를 직접 갖다 대지 말라”고 강조했다. 시향지가 코에서 너무 가까우면 오히려 후각 세포가 너무 빨리 지치기 쉽기 때문이다. 이어 퐁텐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려 하지 말고 개가 코를 킁킁 대듯이 여러 차례 짧게 향을 맡아라”고 덧붙였다.
뷔르탱은 조향사가 향수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궁금하면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변하는 모습을 즐겨보라’고 당부했다. 향 분자는 기체 형태로 후각 세포를 자극한다. 조향사는 이 특성을 이용해 휘발성이 다른 각 성분을 섞어 시간에 따라 향수가 뿜어내는 향을 바꾼다.
전문가들은 보통 향수 향을 탑노트와 미들노트, 베이스노트 이렇게 세 가지 층으로 분류한다. 탑노트는 향수를 뿌리자 마자 제일 먼저 풍기기 시작해 10~15분 동안 이어지는 향이다. 탑노트를 구성하는 향 성분은 끓는점이 섭씨 160~220도로 가장 낮다. 실온에서 날아가는 속도도 제일 빠르다.
미들노트는 향이 뿌려지고 세 시간에서 다섯 시간까지 이어진다. 프랑스에서는 미들노트라는 말 대신 향수의 ‘심장부(heart)’라는 뜻에서 ‘하트노트‘라고 부른다. 베이스노트는 최소 열두 시간에서 몇 년까지 남는 잔향을 말한다. 살갗에 닿아 이어지는 이 향들은 휘발성이 가장 낮아 향수의 마지막 인상을 좌우한다.
이 세 가지 층은 정확한 시간차를 두고 나왔다 사라지기 보다, 수시간에 걸쳐 서로 섞이면서 향수의 개성을 만든다.
개인적으로 향수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한 향수는 통일성을 가지지만, 동시에 시간에 따라 계속 변합니다. 소설에 전개와 절정, 결말이 있는 것처럼 향수도 향으로 쓰는 하나의 이야기죠.
당신이 어떤 향수를 쓰는지는 곧 ‘당신이 상대방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와 같은 뜻입니다.
프레데릭 뷔르탱
수 많은 향수 속에서 나를 대변해 줄 향수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인터뷰 말미에 본인만의 향기를 찾는 법을 묻자 뷔르탱과 퐁텐은 ‘마음의 소리를 들으라’는 답변을 내놨다.
다소 추상적인 답변에 당황하자, 퐁텐은 “정말 나에게 잘 맞는 향수를 만나면 ‘이 향수가 내 향수’라는 확신이 내 안에서 먼저 소용돌이 친다”고 덧붙였다.
뷔르탱 역시 “향수를 쓰다 보면 그저 ‘나 이 향수 좋아’가 아니라 ‘그 향수를 뿌린 내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다고 느껴지는 향수’가 있다”며 “내가 나를 사랑하게 되는 향수를 찾아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나르시즘(自己愛·self-love)과 자기만족은 향수의 기본”이라며 “내성적인 사람일수록 향수로 자기 자신을 표현하기 좋다”고 입을 모아 강조했다. 향수가 하나의 기호품을 넘어, 나를 표현하는 언어로 쓰일 수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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