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택의 그림 에세이 붓으로 그리는 이상향] 56. 슬픈 사연의 화가 이야기1

이광택 2022. 12. 1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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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트레일러(1854∼1949). 미국의 흑인 노숙자 화가이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샤넌이 수소문 끝에 그의 그림을 모았고, 빌 트레일러만을 위한 전시를 열어주었다.

나는 빌 트레일러의 개성 강한 그림을 무척 좋아한다.

빌 트레일러의 그림들을 다시 보면서 분명하게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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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수레바퀴도 돌리기 나름
‘빈손’에게도 세상은 아름다운법
흑인 노숙자 화가 빌 트레일러
쓰레기통 주변 아틀리에 삼아
순진무구한 인간의 본질 표현
언어와 이성은 언제나
경험과 직관보다 늦게 도착
▲ 이광택 작, 고뇌하는 새(2022)

빌 트레일러(1854∼1949). 미국의 흑인 노숙자 화가이다. 앨라배마주의 목화농장에서 평생을 소작농으로 살다가 류머티즘 관절염에 걸리자 서리 맞은 구렁이 신세가 되어 농장에서 쫓겨나 노숙자가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85세의 고령이었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긍정의 방향으로 돌리면 모자람도 득이 되고 부정의 방향으로 돌리면 넘침도 손해가 되는, ‘돌리기 나름’의 것인가. 길거리에 버려진 그는 먹고살기 위해서 무슨 일이건 해야 했다. 거리의 구석진 자리에 ‘벽화’처럼 앉아 그가 선택한 일은 바로 그림 그리기였다. 그에게는 쓰레기통 주변이 아틀리에였고 장례식장의 의자나 구둣방 옆이 침실이었다. 그의 도화지는 옷을 포장하는 종이나 광고지, 버려진 나무상자의 판자 따위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평생을 바쳐 일했던 목화농장의 모습을 회상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낮에는 그가 앉은 자리 뒤편을 갤러리 삼아 자신의 그림을 전시했다. 한마디로 그에게는 길거리가 갤러리인 셈이었다.

검색해 보면 잘 아시겠지만, 그의 그림 속에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백인 농장주가 흑인 소작인들보다 농장의 동물들을 더 소중하게 생각해서였을까? 그의 그림 속 동물들은 사람들보다 크고 중요하게 보인다. 또한 그는 주어진 환경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이었나 보다. 나 같으면 자신의 인생을 후회하거나 평생 노예 비슷하게 살게 한 주인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그림을 그렸을 법한데, 그의 그림에서는 어떠한 분노도 보이지 않는다.

개똥밭에도 이슬 내릴 날이 있다고 하더니! 양처럼 착한 마음을 지녀서였을까. 흑인 할아버지에게 천사가 찾아왔다. 찰스 샤넌이라는 화가가 길을 걷다가 우연히 그의 그림들을 보았고 즉시 후원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용이 여의주를 얻고 범이 바람을 탄 격이었다. 그렇게 후원을 받은 빌 트레일러는 그 후로 3년 동안 1,500점이 넘는 작품을 그려낸다. 하지만 노예와 다름없는 소작농 출신 흑인 화가의 그림을 그 누가 좋은 값에 사주겠는가. 게다가 운마저 도와주지 않았다. 2차대전이 터져 샤넌마저 참전하자 집도 가족도 없는 트레일러는 여러 곳을 떠돌면서 이슬과 햇볕에 몸을 맡기다가 95세에 세상을 떠났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샤넌이 수소문 끝에 그의 그림을 모았고, 빌 트레일러만을 위한 전시를 열어주었다. 그리고 트레일러가 세상을 떠난 지 50년만인 1982년, 워싱턴의 코코란 갤러리 전시를 통해 그의 그림들은 비로소 세상의 주목과 사랑을 받게 되었다. 숱한 미국의 미술관에 그의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나는 빌 트레일러의 개성 강한 그림을 무척 좋아한다. 분청사기에 선각을 남긴 우리나라의 옛 도공의 그림처럼 순진무구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본질이 그의 작품 속에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은 단순하고 소박하기 짝이 없다. 완전히 어린아이 그림 같다. 그럼에도, 아니 그래서 힘이 나온다. “단순함은 궁극의 정교함이다”라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말하지 않았던가. “내가 잃어버렸던 어린아이의 마음을 되찾을 때까지 9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피카소도 회상했는데, 트레일러는 애초부터 거창한 어른의 마음, 잘 그려야 한다는 미술가의 의지, 그리고 예술을 통한 구원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는 그저 숨쉬고 느끼고 사랑하고 괴로워했던 자신과 사람들의 일상을 묘사했을 뿐이다. 어쩌면 그에게 그림이란 뼛속 깊은 골수에 가 닿아 삶을 견디게 하는 에너지가 아니었을까. 돌아가 몸을 의탁할 수 있는 푸근한 ‘고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빌 트레일러의 그림들을 다시 보면서 분명하게 깨닫는다.

최소한의 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의 눈으로도 세상을 얼마든지 아름답게 볼 수 있다는 것을! 언어와 이성은 언제나 경험과 직관보다 늦게 도착한다는 사실을!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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