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국민과 문화는 죄가 없다 [이규화의 지리각각]

이규화 2022. 12. 16. 0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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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콥스키 음악이 전쟁과 무슨 상관?
우크라장관 '호두까기인형' 대체 요구
유서깊은 콩쿠르 하루아침에 왕따시켜
도스토옙스키가 우크라 침공의 공범?
여행객 입국금지는 21세기 인종 차별

러시아 문학작품에 언제쯤 웃는 장면이 나올까 읽다보면 끝까지 읽게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러시아 문학은 왜 그리 심각하냐는 핀잔이다. 그러나 러시아를 빼고 문학을 말한다는 건 바이올린이 빠진 모차르트를 듣는 것과 같다. 일국의 문화와 예술을 평가하거나 배제하는 건 가당치도 않거니와 어리석은 짓이다.

그런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으로부터 러시아 문학과 예술이 도매 급으로 매도당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 근거가 작품과 예술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단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의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니 문제다. 이런 현상이 일부 몰지각한 개인이나 단체에만 국한되지 않고 정부기관이나 관리, 멀쩡한 지식인들에 의해 일어나거나 방조되고 있다.

서방의 무조건적 러시아 배척은 선량한 러시아인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현재 EU(유럽연합) 회원국 27개국은 러시아인들에게 쉥겐조약(회원국간 이동 때 무비자 통행을 보장하는 조약) 효력을 거둔 상태다. 나라별 정책에 따라 다르지만 발트3국과 체코 폴란드 등은 아예 러시아인 입국을 막고 있다. 대서양 건너 미국과 캐나다도 마찬가지다. 매서운 겨울철 추위를 피해 매해 유럽을 여행해온 러시아인들은 발이 묶이거나 우회로를 통한 유럽 입국을 시도하고 있다. 이 경우 비용은 갑절로 더 들게 된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빚은 인종적 철의 장막과 문화배타주의를 들여다본다.

◇황당한 차이콥스키 '호두까기인형' 보이콧 요구

최근 외신에 따르면 올렉산드르 트카첸코 우크라이나 문화부 장관이 영국 일간지 가디언 기고를 통해 서방 국가들에게 러시아 작곡가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연주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라는 전제를 달았지만, 그 이유가 황당하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예술작품이 보관된 박물관과 유적 등 문화예술시설을 공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러시아의 야만적 행위를 비난할 순 있지만 차이콥스키 음악과 연관시키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대체 차이콥스키 음악이 전쟁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트카첸코의 주장의 빌미는 이미 우크라이나전쟁 초기에 제공됐다. 지난 2월과 3월 전 세계의 많은 오케스트라들이 우크라이나와의 연대 의미에서 차이콥스키 곡을레퍼토리에서 제외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군대의 모스크바 침공에 맞서 방어에 성공한 러시아군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880년 작곡한 교향곡 '1812년 서곡'에는 더 심한 제재가 가해졌다. 가령 외신 보도에 따르면 영국 카디프필하모닉은 이 곡을 연주하려던 계획을 부랴부랴 다른 곡으로 교체했다고 한다.

연말에는 전 세계 많은 발레단이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인형'을 무대에 올린다. 12월은 '호두까기인형' 공연의 가장 큰 대목이다. 그런데 트카첸코의 말대로라면 이 발레극은 무대에 올려서는 안 된다. 이 일로 트카첸코는 무안을 당하기도 했다. 가디언에 따르면 트카첸코는 세계적인 발레단인 영국의 로열발레단이 '호두까기인형'을 공연한다는 것을 알고 우크라이나 작곡가의 작품으로 대체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거부당했다.

트카첸코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원하거나 적극 지지하는 현대 예술가들에 대해서도 보이콧을 하도록 요청했다. 이 부분은 적잖은 지지를 받고 있다. 전쟁의 배경이야 어떻든 전쟁을 일으킨 쪽은 푸틴 대통령이고 그를 지지하는 것은 침략에 동조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카첸코는 오지랖이 너무 나갔다. 현존 세계 최정상급 인기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를 견제하는 발언을 했다가 씨알도 먹히지 않은 것이다. 그녀는 러시아 출신이지만 성가신 비자절차 때문에 오스트리아 국적을 취득했다. 푸틴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네트렙코는 전쟁 발발 후 전쟁 반대 입장을 피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배역이 배제된 바 있다. 지난 7월 전쟁에 반대한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밝힌 후에야 독일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로열발레단처럼 예술을 예술로 대하는 단체도 있지만, 서방 클래식음악계의 러시아 비토는 이해할 수 없는 형태로도 나타난다. 세계 3대 콩쿠르로 꼽히는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대해 국제콩쿠르연맹(WFIMC)이 지난 4월 총회를 열고 회원자격을 박탈한 것이다. 이유는 차이콥스키 콩쿠르 재단이 러시아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고, 재단 위원장인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친 푸틴 성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 어떤 문화예술단체도 정부 지원을 전혀 받지 않는 경우는 없다. 전쟁을 옹호했거나 지지하지도 않았는데 지휘자의 개인적 교분을 들어 유서 깊은 콩쿠르를 퇴출시키는 것은 예술에 대한 모독이다.

◇황당무계한 도스토옙스키 폄하

'죄와 벌'의 19세기 러시아 작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도 화를 면치 못했다. 지난 8월 국내 출간된 '우리는 침묵할 수 없다'는 책에서 우크라이나 루브코 데레쉬라는 작가는 도스토옙스키가 우크라이나 침공의 공범이라는 주장을 했다. 그는 러시아 문학에는 개인의 존엄과 자유, 책임이 결여돼있다는 '엄청난 판단'을 내리기도 했다. 책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또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에게 인간성을 회복시켜주지 못한다"고까지 했다.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비록 처음부터 끝까지 '웃음'이 없지만, 인간이 과연 어떤 존재인지 밑바닥까지 훑어낸 작품이다. 데레쉬라는 작가가 어느 급의 인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떻게 이렇게 쉽게 말을 할 수 있나.

한편 외신에 따르면 이탈리아 밀라노의 한 대학에서는 도스토옙스키 문학론을 개설하려다 취소했다는 소식도 있다. 그런데 그 이유인즉슨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때에 러시아 작가론을 논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같은 논리라면, 2차 세계대전 당시 세계의 수많은 대학 강의실에서는 괴테의 'ㅤ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도, '파우스트'도 읽어서는 안 된다. 150년 전 작가를 오늘의 상황에 끌어와 둘러대는 것도 코미디지만, 도스토옙스키가 작품에서 침략전쟁을 지지하거나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비난한 것도 아닌데, 단지 러시아 문학이라는 이유만으로 보이콧 당하는 것은 황당무계하다.

◇러시아인 입국금지, 앞에서 막고 뒤에선 구멍

매서운 추위가 닥치는 겨울이면 많은 러시아인들이 지중해 연안의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남부해안으로 피한을 온다. 그런데 우크라이나전쟁이 발발한 이후 이번 겨울에는 여행이 어렵게 됐다, 유럽연합(EU) 27개 회원국이 지난 9월 러시아인에게는 쉥겐비자 발급 간소화 절차를 중단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앞서 EU는 지난 2월 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 러시아 항공편의 유럽 운항을 금지했다. 그 보복으로 러시아도 유럽 항공편의 자국 운항을 막으면서 두 지역간 왕래는 급속히 줄어들었다. 지난 8월에는 EU가 러시아인 여행자에게 적용해온 비자 발급 간소화 조치를 중단했고 이윽고 쉥겐조약에서도 러시아인을 배재한 것이다. 특히 발트 3국과 폴란드는 자국을 경유해 다른 EU 국가로 여행하는 러시아인들에게 문을 닫았다.

그러나 EU 내에서도 나라마다 러시아인 입국 단속은 천차만별이다. 핀란드, 체코, 폴란드, 발트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등은 엄격히 통제하는 반면 스페인과 그리스 등 관광산업 의존도가 높은 남서유럽 국가들은 튀르키예(터키)와 중동 등을 경유해 들어오는 러시아인 유입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다. 스페인은 최근 러시아인 입국자가 전년 대비 3배나 늘었다고 한다.

유럽 여행이 봉쇄되자 러시아인들은 태국 등 동남아시아로 몰리고, 심지어 쿠바와 베네수엘라까지 찾고 있는 실정이다. 서방 국가들은 사실상 자신들의 '적성국'이 된 러시아 국민들이 자국 영토를 자유롭게 여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스파이행위 등을 우려한 조치다. 그러나 러시아 입국자들은 절대 다수가 단순한 여행 목적의 관광객들이다. 전쟁과 상관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입국을 막는 것은 21세기 인종적 차별이 아닐 수 없다.이규화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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