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The Column] 인간적 연민 노리는 ‘나쁜 정치’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2022. 12. 16.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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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세상은 종말을 맞이한다. 모든 사람이 죽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사형 집행이 예정된 사형수가 있다. 이 사형을 집행해야 할까? 일반적인 상식에 따르면 사형은 집행되지 않을 것이다. 내일이면 세상이 멸망하는데 처벌이 무슨 의미인가? 게다가 사형수에게도 어머니가 있을 테고 그 어머니 역시 내일 죽는다. 사형수를 풀어주고 어머니를 만나게 해주는 것이 인간적이다.

16일 오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화랑유원지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7주기 기억식 및 4·16생명안전공원 선포식'에서 유은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 2021.04.16 고운호 기자

이마누엘 칸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의 사형은 집행되어야 한다.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사형수 본인의 존엄을 위해서다. 무슨 소리일까? 칸트에게 인간의 존엄이란 그가 스스로의 행위에 책임을 지는 인격적 주체로 존중받는다는 말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런데 처벌은 범죄의 결과다. 따라서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은 범죄자를 한 사람의 인격체로 존중하는 것이다. 최후의 순간까지 문명과 도덕을 수호하기 위해, 사형수의 인격을 지켜주기 위해, 확실하게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

칸트가 말한 사형수의 역설은 근대 이전과 이후의 윤리학이 나뉘는 지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근대 이전, 중세와 고대, 더 나아가 원시 사회의 도덕은 감정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불쌍한 자는 도와주고 얄미운 놈은 혼내주는 것이다. 그러한 자연스러운 감정이 온화한 방향으로 발휘될 때 우리는 ‘착하다’ 혹은 ‘인간적’이라는 말을 쓴다.

반면 근대 이후의 도덕은 법칙에 기반을 둔다. 이성을 가진 존재라면 지켜야 하는 법칙이 있고,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것을 이해하고 따라야 한다. 자유롭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행동하고 책임을 지는 것은 단지 인간적 차원을 넘어서는 ‘인격적’ 행위다. 인간은 그러한 인격적 행위를 통해 존엄한 존재, 근대적 주체가 된다.

근대 이전의 윤리는 인간적 연민에 의해 지탱된다. 근대 이후의 윤리는 인격적 존중을 근간으로 삼는다. 두 윤리는 상보적이다. 인간적 연민이 없다면 사회는 금세 삭막하고 잔인한 곳이 되고 만다. 하지만 연민만으로는 근대에 필요한 합리성과 예측 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인격적 존중, 시민적 신뢰가 중요한 것은 그래서다. 내가 이해하는 세상의 규칙을 너도 이해하고 있으며, 내가 그것을 지키듯 너도 지킬 것이라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를 되짚어 보자. 전쟁의 포화를 뒤집어쓴 신생 국가 대한민국은 북한보다 빨리 경제를 발전시키고 군사력을 확보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조국 근대화라는 지상명령 앞에 인간적 연민은 버려야 할 감상이나 떨쳐내야 할 나약한 소리 취급되기 일쑤였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그 관계가 역전되었다. 인간적 연민의 가치를 회복하는 수준을 넘어, 오직 인간적 연민만이 도덕적이라는 목소리가 우리 사회를 뒤덮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2021년, 문재인 전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7주기를 맞아 유가족들 앞에서 ‘성역 없는 진상 규명’을 약속했던 일을 우리는 가장 나쁜 사례로 떠올려볼 수 있다. 세월호가 침몰한 원인, 침몰 과정, 그 결과에 대해 과학적으로 밝힐 수 있는 것이 사실상 모두 드러난 다음이었다. 그러나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지 못했다. 일부 유가족과 사참위 위원들의 반발 때문이었다.

문 전 대통령이 세월호 유가족을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있었다면 그는 공허한 진상 규명 약속을 더 이상 하지 말았어야 한다. 세월호 참사는 세계 각지에서 발생했던 유형의 해상 사고였음을 설명하고, 우리가 함께 느꼈던 애통한 마음을 전달하여, 유가족이 사회의 일원으로 복귀하고 일상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왔어야 마땅하다.

물론 현실은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여전히 ‘진상 규명’을 갈구하는 유가족을 남겨둔 채 문 전 대통령은 양산 사저에서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지난 정권이 과시했던 인간적 연민은 인격적 존중을 결여하고 있다. 어쩌면 인간적 연민조차 아닐지 모른다.

필자가 유년기를 보낸 1980년대와 1990년대까지도 우리 사회에는 인간적 연민이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우리가 그 소중한 가치를 잃지 않기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격적 존중의 가치를 이해하고 되찾아 도덕의 두 날개를 펼치는 과정이 반드시 요구된다. 이는 세월호 참사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정권은 바뀌었지만, 인간적 연민을 앞세워 투쟁의 도구로 삼는 나쁜 정치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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