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끝물
대구의 한 아파트. 주민 대상으로 투표를 진행했다. 공식 안건은 경비원 근무 시간 단축. 속을 들여다보면 사실상 경비원 인건비 삭감이다. 사정은 이렇다. 지금까지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주간 근무제를 시행해 왔다. 총 12시간 중 점심 2시간, 저녁 2시간 무급 휴식 시간이다. 이후 저녁 8시부터 다음날 아침 6시까지 야간 및 심야 근무를 한다. 심야 시간 중 4시간은 무급 휴식 시간이다. 총 20명의 경비원이 24시간 중 무급 휴식 시간 8시간을 제외하고 16시간 교대로 일한다. 문제는 심야 근무다. 경비원 휴게실에서 5인이 돌아가며 순찰을 하는데, 입주민은 경비원이 근무하고 있지 않다고 인지하고 있다. 어차피 인지도 안 되는 심야 근무를 유지할 필요가 없으니 이참에 폐지하자는 것이 골자다.
이렇게 바꾸면 어떤 이점이 있나? 1일 1인 평균 근무 시간이 6.75시간에서 5시간으로 줄어든다. 무급 휴식 시간도 점심 2시간, 저녁 2시간, 심야 4시간을 합해 총 8시간에서 점심 2시간으로 대폭 줄어든다. 1인당 경비비도 230여만원에서 175만원 정도로 줄어들어 인건비를 아낄 수 있다. 연간으로 따지만 1억4000만원에 달하는 큰돈이다. 덕분에 24평형은 7000원, 34평형은 1만원, 52평형은 1만5000원 정도 매달 덜 내게 된다. 경비원의 무급 휴식 시간을 대폭 줄이는 ‘탄력근무제’ 덕분에 효율성이 높아진다. 문제가 있기는 하다. 지금까지는 야간에도 경비근무자가 있어 비상시 응급대처 등 주민편의를 제공할 수 있었다. 바꾸게 되면 비상시 응급대처가 불가능해진다.
투표해보니 찬성이 절반을 넘었다. 경비비가 줄어들어 매달 지출할 돈이 적어진다는 점이 호소력을 발휘했다. 그렇지 않아도 저임금에 시달리던 경비원의 임금이 삭감되는 것은 살필 여력이 없다. 심야 시간에 발생할 수 있는 안전사고에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런데도 왜 이런 결정을 내린 걸까? 매달 내는 경비비 중 7000∼1만5000원 아끼자고?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지역경제가 코로나19 사태로 더욱더 힘들게 되었다.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한다. 삶이 팍팍할수록 절약을 생활화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언뜻 보면 절약 정신이 돋보이는 듯한데, 사회학자인 내 눈에는 다른 게 보인다.
2005년 대구로 왔다. 신자유주의 바람을 타고 자기계발 담론이 힘을 받던 때다. 서울에서는 학벌, 학점, 토익, 자격증, 어학연수, 수상 경력, 인턴 경험, 봉사활동 등 온갖 스펙 쌓기가 대학생의 필수활동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대구에 있는 대학생은 그렇지 않았다. 뭔지 모르게 여유로워 보였다. 서울 대학생과 지역 대학생은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나는구나. 뒤늦게 지역 대학생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지역 대학생은 경쟁 밖에 자신을 위치 지운다. 설사 경쟁에 뛰어든다 해도 느슨하게 한다. ‘성찰적 겸연쩍음’으로 경쟁 과정과 결과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는다. 그러던 지역 대학생이 언젠가부터 스펙 쌓기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별 쓸모도 없는 자격증 따고 해외 연수를 다녔다. 서울에서는 스펙 쌓기가 별 소용이 없다는 게 밝혀져 주춤할 무렵이다.
지역 소멸이 눈앞 현실로 다가왔다고 다들 난리다. 지역도 강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이에 대처하기 시작했다. 효율성을 높이자고 하는데 문제는 끝물에 접어든 신자유주의를 흉내낸다는 것이다. 아파트 관리를 기업 경영하듯 하려고 한다. 가치 혁신 대신 인건비 후려쳐서 이윤 추구하는 악덕 고용주처럼 군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자본가가 되려고 해야지 왜 노동자가 되려고 하냐는 유명 금융인의 호통이 뒤늦게 힘을 발휘한다. 지역이 뒤떨어진 건 다른 이유가 아니다. 왜 하는지도 모르면서 안 하면 안 될 것 같아 끝물에 올라타는 게 진짜 문제다. 지역을 초월하여 더욱더 일반적인 관점에서 지역을 성찰할 수 있는 문화 역량을 키워야 할 때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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