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평범한 사람들의 새로운 역사 영화를 위해
돌아보니, 2022년 한 해, 많은 역사 영화들이 개봉했다. 여름 극장가에 <한산>이 있었고, 소현세자의 죽음을 그린 <올빼미>(사진)가 11월 개봉했고, 12월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다룬 뮤지컬 <영웅>을 영화로 개봉한다. 20세기 초 한국 문화계에 등장한 신조어 팩션(faction)은 역사적 사실에 작가적 상상을 보탠 이야기를 지칭했다. 이순신이 무과 시험에서 낙방한 상상을 그린 <천군>과 같은 소품들도 있었지만, 한 광대를 ‘너(爾)’라며 특별히 호명했다는 실록 한 줄에서 출발한 <왕의 남자> 같은 명작도 있었다.
그런데 우리 영화사 속 역사 영화의 소재는 매우 좁다. 역사 영화가 아주 많은 것 같지만 그 소재나 관심사가 제한적이다. 현대문학 초기 이광수, 김동인 같은 작가들의 역사소설 출발도 그랬다. 이광수는 1928년 <단종애사>를 동아일보에 연재해 인기를 끌었다. 김동인은 1933년 흥선대원군을 다룬 <운현궁의 봄>, 수양대군을 소재로 <대수양>을 1941년에 썼다. 단종, 세조, 사도세자와 같은 인물들에 대한 편애는 드라마, 영화에서도 반복되었다. 역사 영화는 주로 왕가 중심, 비운의 결말을 맞는 왕실 비사를 주목했다. 따지자면 왕실 스캔들이 곧 대중적 역사 서사의 주류였다.
2000년대 이후 대규모 제작비와 그 손익분기점을 넘는 영화들의 관심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명량> <한산>이 이순신 이야기라면, <왕의 남자>는 연산군 스캔들이 출발이고, <관상>은 수양대군과 단종의 가족 비극이다. <올빼미>도 소현세자 죽음의 미스터리와 인조와 세자 사이의 가족 비극이라는 점에서 유사한 맥락 위에 있다.
왕가 중심의 역사 영화가 일제강점기 무렵을 다룰 때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는 이유도 여기서 멀지 않다. 그 시기 왕가의 선택들은 일제강점과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우리 근·현대사의 한 축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질곡에 책임질 의무도 있는 것이다. 영화 <영웅>의 명성황후 시해 장면을 보고 단지 멜로드라마적 눈물만 흘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근·현대사의 복잡한 난맥 속에서 왕가의 판단 착오와 무능력은 대중적 역사 서사에서 늘 비운의 가족사로 가려지곤 했다.
뮤지컬 특성상 <영웅>은 안중근의 행적을 굵직굵직하게 다룬다. 하지만 김훈의 소설 <하얼빈>은 우리가 몰랐던 안중근의 뒷모습에 집중한다. 소설을 통해 안중근에 대해 몰랐던 사실들이 드러난다. 중근의 자손들이 어떤 오욕을 견뎌야 했는지, 왜 독실한 신자였던 도마가 1993년이 되어서야 김수환 추기경을 통해 복권될 수 있었는지가 담겨 있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는 명언으로 기억되던 평면적 영웅 안중근과 그 일가가 겪었던 고욕과 질곡이 기록으로 다시 되살아난 것이다.
고 박병선 박사가 그 반환에 온 생애를 쏟았던 외규장각 의궤 기록을 보면 조선 시대 500년의 다양한 희로애락과 길흉화복, 생사고락이 담겨 있다. 가례, 세자 책봉, 사랑했던 장손의 이른 죽음을 기리는 장례, 가례 후 60년을 맞는 혜경궁을 위해 그 자손이 마련한 왕실 잔치 등 우리가 몰랐던 왕실의 다양한 감정의 흔적이 의궤 기록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조선왕조는 500년 역사를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했다. 실록, 승정원일기, 의궤 등을 깊이 읽다 보면 우리가 전혀 보지 못했던 다양한 왕가의 삶이 입체적으로 떠오른다. 아니, 왕조를 벗어나면 더 좋다. 이민진의 소설 <파친코>가 역사가 놓친 선자를 통해 생생한 상처를 보여주고, <사울의 아들>의 허구적 사건이 아우슈비츠 실제 기록보다 더 생생한 감동을 준다. 역사의 진실이 왕족, 귀족, 상류층을 통해 구현되는 것은 아니다. 대중의 기억은 허술해서 결국 몇몇 살아 남은 자들 편의로 재구성된 이야기를 역사로 믿기도 한다. 거듭 다뤄지는 왕가 스캔들은 결국 대중적 선정성과 휘발성이 높은 가연성 소재들이다. 조금만 더 부지런하다면, 아직 한 번도 소설이나 영화가 되지 못한 보물들을 남겨진 기록에서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이광수나 김동인이 그릇된 왕조 중심으로 집착했던 스캔들이 아닌, 알려지지 않은 작은 이야기들을 역사에서 찾아보면 어떨까? 역사란 단지 상류층만의 것이 아니기에 평범한 시민의 역사성은 완전히 새로운 역사 영화를 통해서만 기록되고 구현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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