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세·에너지효율규제… 유럽도 수입 장벽 높인다
포스코, 현대제철, 한국철강협회 관계자들은 이달 초 유럽을 방문해 유럽철강협회, 유럽자동차제조협회 등 EU(유럽연합) 산업계 관계자들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국내 철강업계 관계자들은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도입에 대한 우려를 강하게 전달했다. 하지만 2주 뒤 EU 당국은 철강·비료 등의 수입품에 대해 사상 최초로 탄소국경세를 물리는 CBAM 도입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업계에서는 한국의 EU 주력 수출 품목인 철강 산업의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이 자국 내 생산 전기차에만 보조금 혜택을 주는 인플레 감축법(IRA)을 시행한 데 이어 EU마저 보호무역정책을 속속 내놓고 있어, 국내 수출 기업들이 초비상이다. 갈수록 높아지는 자국 중심주의와 보호무역 파고에 한국 경제 성장을 이끌어 온 수출 전선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미국 이어 유럽마저… 갈수록 거세지는 보호무역주의
EU는 내년 10월부터 수입품의 탄소 함유량이 기준치를 초과할 경우 탄소 가격을 추가로 부과하는 탄소 국경세를 시범 도입하기로 했다. 특히 철강과 비료, 알루미늄처럼 탄소 배출이 많은 제품을 수출하는 기업은 제도 시행 후 첫 3년간 탄소 배출량을 의무 신고해야 한다. EU는 “이를 통해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1990년 대비 최소 55% 감축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국내 철강업계는 “CBAM 조치는 무역 장벽이고, 외국산 차별을 금지하는 WTO 규범에 위배된다”고 반발하고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는 EU에 43억달러(약 5조6000억원)어치의 철강 제품을 수출했다. CBAM 시행으로 한국이 부담해야 할 금액은 오는 2026년 9600만유로(약 1333억원)에서 2035년 3억4200만유로(약 4700억원)로 점차 늘어날 것이라는 게 국제 기후변화 싱크탱크 E3G의 분석이다.
국내 가전 업계도 EU의 강화된 에너지 효율 규제 때문에 비상이다. EU는 내년 3월부터 한층 강화된 TV 에너지 효율 기준 규제를 시행할 계획이다. 기존 4K(초고화질) TV까지 적용되던 에너지효율지수가 전력 소비량이 많은 8K와 마이크로 LED TV 제품군까지 확대되고, 기준을 맞추지 못한 제품은 EU 내 판매가 원칙적으로 금지된다. 8K TV는 4K TV보다 화소 수가 4배 더 많아 전력 소비량도 훨씬 크다. 삼성전자·LG전자 8K TV 제품에는 EU 전력 규제 기준을 충족하는 제품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가전업계 관계자는 “내년 3월까지 EU 기준대로 소비 전력을 단기간에 줄이는 것은 기술적으로 어렵다”며 “밝기를 낮춰 출하하는 방법밖에 없는데 이렇게 되면 기존 4K TV와의 차별성이 떨어져 판매 감소 직격탄을 맞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디스플레이 전문 시장조사업체 DSCC에 따르면 지난해 36만대 수준을 기록한 8K TV 시장에서 서유럽 판매 비율은 31%(11만4000대)에 달한다. 여기에 더해 EU는 전략적 핵심 원자재를 선정해 공급망을 강화하는 ‘EU판 IRA 법안’인 핵심원자재법까지 추진하고 있어, 자동차 업계와 국내 전기차 배터리 업계도 긴장하고 있다.
◇올 상반기 수입 규제, 전 세계 27국에서 208건
세계 각국은 한국산 제품에 대한 직접적인 수입 규제를 갈수록 강화하고 있다. 15일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에 따르면 올 상반기 한국에 대한 수입 규제(반덤핑·상계관세·세이프가드) 조치는 총 27국, 208건이 시행 중이다. 2011년 말 117건에 비해 10년 사이 2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품목별로 보면 철강·금속 업종 수입 규제가 100건(48.1%)으로 가장 많았다. 철강 산업의 공급 과잉 문제가 불거지면서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있는 한국 제품에 수입 규제가 집중됐다는 분석이다. 화학(41건), 플라스틱·고무(23건), 섬유·의류(15건), 전기전자(9건)에 대한 수입 규제도 적지 않았다.
각국의 보호무역 조치 움직임과 수입 규제까지 겹쳐 무역을 통해 성장해온 한국 경제는 올 들어 무역수지 적자가 급격히 불어나면서 힘겨운 처지다. 관세청에 따르면 이달 10일까지 올해 한국의 누적 무역 적자는 474억6400만달러(약 61조8000억원)로, 종전 최대였던 1996년(206억2400만달러)보다 배 이상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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