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기록의 기억] 한때 피란민들의 아픔과 희망이 서렸던 그곳…이제는 ‘지역감정’에 아리다

기자 2022. 12. 16.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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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영도다리
1971년, 2022년 영도다리. 셀수스협동조합제공

아버지는 자신도 본 적이 없는 부산 영도다리를 가족들에게 설명했다. “다리가 하늘 위로 솟구치면 그 밑으로 큰 배가 지나간다”는 아버지 얘기가 신기하면서 거짓말 같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북한군 침략으로 피란민들은 남쪽으로 내려갔다. 피란길에서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거듭 상기시켰다.

“엄마, 아버지랑 헤어지면 어디서 만나자고?” “영도다리요.”

“어디라고?” “영도다리.”

일제강점기 1934년에 세워진 영도다리는 다리길이 214m 중, 교각 사이 한쪽 다리 상판 31m가량이 80도 이상 들어져 올라가는 한국 최초의 도개교(跳開橋)로 부산의 명물, 랜드 마크다. 그래서 영도다리는 아이들도 쉽게 찾을 수 있다고 어른들은 판단했다. 이산가족이 된 피란민들은 초조했지만 육지(부산)와 섬(영도)을 이어주는 다리를 보며 가족상봉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다리는 약속대로 매일 정해진 시간에 맞춰 올라갔지만 만남은 좀체 이뤄지지 못했다. 인산인해, 피란민들이 몰려 있는 다리 밑을 피해 조금 높은 곳, 다리 난간에서 가족을 찾았다. ‘제발 눈에 들어 와다오.’ 간절히 가족 이름을 부르며 금속 난간에 칠해진 페인트가 벗겨질 정도로 움켜잡은 애절한 손때가 지문처럼 난간에 찍힐 무렵, 저녁 해가 영도다리에 걸렸다. 그리고 피란민들 눈물이 붉게 난간 위에 떨어졌다.

“금순아 어디를 가서 길을 잃고 헤매이느냐,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승달만 외로이 떴다”는 그 당시 유행가 가사처럼 피란민들 눈동자에는 초승달과 헤어진 가족 얼굴이 어렸다. 그러나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게 없는 피란민들의 퀭한 희망은 등대등불의 부스러기로 점멸되어갔다. ‘엄마!’ 하고 부르는 아이들 목소리 같은 뱃고동 소리는 교각에 부딪히는 파도와 함께 포말로 부서지고 ‘만나자는 약속’은 더 멀리 밀려만 갔다.

인근 자갈치 시장에서 풍겨오는 고등어구이 생선연기에 불현듯 배고픔을 느낀 어머니는 ‘잃어버린 내 새끼는 굶고 있는데…’ 죄책감에 혀를 깨물어 허기를 씹어 삼켰다. 영도다리가 들어올려야 할 고통의 무게는 피란민들 피눈물의 합이었다.

전쟁으로 고아가 돼서 병사, 아사한 아이들이 다리 밑에 버려지고 이는 ‘영도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부산 말썽쟁이 아이들 탄생설화의 서글픈 모체가 되었다. 1966년에 영도다리 밑으로 상수도관을 매달면서 도개가 멈췄다.

그러다가 2013년부터 다시 다리를 들어올리고 있다. 그 밑으로 대형 화물선 등이 지나가지만 관광이 주 목적이다.

‘우리가 남이가’ 하는 사투리를 쓰는 정치인들이 종종 지역감정으로도 표가 모이지 않으면 “선거에 패하면 영도다리에서 뛰어내리자”고 한다. 가족과 생이별한 피란민들이 영도다리에서 투신하기도 했다. 이제 영도다리에서 빠져 죽어야 하는 건 ‘지역감정’이다.

김형진 셀수스협동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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