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엽의고전나들이] 한 사람의 지혜로는 부족하다

2022. 12. 16.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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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라에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도둑놈이 많다고 일갈했는데, 많은 이들이 공감했던 이유는 나라의 재물은 월등하게 늘었는데도 여전히 어려운 사람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재물이 아니라 지혜라면 어떨까? 재물의 속성은 나누는 순간 줄어들기 때문에 움켜쥐려는 성향이 강하다지만, 지혜야 나누어 써도 줄지 않고 가진 지혜를 일러주겠다며 제가 먼저 나서는 일도 많으니 사정이 다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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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라에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도둑놈이 많다고 일갈했는데, 많은 이들이 공감했던 이유는 나라의 재물은 월등하게 늘었는데도 여전히 어려운 사람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재물이 아니라 지혜라면 어떨까? 재물의 속성은 나누는 순간 줄어들기 때문에 움켜쥐려는 성향이 강하다지만, 지혜야 나누어 써도 줄지 않고 가진 지혜를 일러주겠다며 제가 먼저 나서는 일도 많으니 사정이 다를 것 같다.

어떤 고을에 후처에 빠진 선비가 살았다. 전처의 딸이 혼례를 치르는 첫날 밤, 어떤 도적이 군복 차림으로 칼을 휘두르며 신랑은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를 쳤다. 누가 봐도 치정극이 벌어지는 상황인데, 신랑이 두려워 나가려 하자 신부가 처리하겠다며 나섰다. 그러더니 그 도적을 부둥켜안고 어쩌려고 이러시냐고 했다. 그러자 도적은 칼을 던지고 머리를 숙였는데 집안사람들이 불을 켜고 비춰보니 계모였다. 계모가 계략을 꾸며 전실 자식을 의심 사게 해서 혼사를 망치려는 것이었는데 딸이 그걸 알고 막아선 것이었다.

그러자 신랑은 곧바로 행장을 꾸려 제집으로 돌아갔고, 계모는 딸이 자기를 모함했다며 신부를 죽여서 묻었다. 한참 뒤에 신랑이 와보니 신부가 병들어 죽어 장사 지냈다고 했는데, 신랑이 무덤을 파헤쳐 염한 것을 풀어보니 옷에 핏자국이 얼룩져 있었다. 신랑은 다시 새 옷으로 입혀 염을 하여 장사 지내고 장인에게 그 내막을 일렀고, 장인은 후처를 내쫓았다.

이 이야기는 조선조 최고의 선비로 꼽히는 이덕무가 쓴 ‘혜녀전’(慧女傳)이다. 악한 계모 이야기의 틀을 가지고 있으나 ‘-전(傳)’을 표방한 것을 보면 실화였을 성싶다. 표제에 달아둔 대로 한 지혜로운 여자 이야기로 읽히고, 글쓴이 역시 “여자의 지혜로움이여!”로 시작하는 평결을 달아두었다. 남편을 구하고 남편의 의심을 풀었으니 지혜롭다는 것이다. 그러나 글쓴이는 바로 이어서 “아, 남편의 지혜롭지 못함이여!”라고 통탄한다. 아내의 계모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도 아내를 놔두고 혼자 가서 아내를 해치게 하였으니 지혜롭지 못함이 심하다는 것이다.

아내의 지혜가 넘쳐 제 목숨을 구하고도 아내를 돌보지 않은 처사가 한탄스럽다. 더 따지고 들면 사리분별 못 하는 아버지가 빚어낸 비극이겠는데, 세상에 지혜가 없는 게 아니라 남들의 지혜를 가져다 제 잇속 챙기기에 급급한 도적이 많을 뿐이다.

이강엽 대구교대 교수·고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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