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란 중 병에 걸린 이순신... ‘온백원’을 처방해준 건 허준이었다?[유석재의 돌발史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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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치못할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지난주 ‘유석재의 돌발史전’ 원고를 게시하지 못했습니다. ‘돌발史전’ 뉴스레터를 시작한 뒤 처음으로 예정에 없이 한 주 쉬게 된 것, 머리숙여 사과드립니다.
지난번 ‘돌발史전’(https://www.chosun.com/culture-life/relion-academia/2022/12/02/SLFME7FU75HJXEO5TIN3WEB6HU/)에서 저는 최근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일본에서 환수해 공개한 경자년(1600년)의 ‘유성룡 비망기입 대통력’이란 문서에, 놀랍게도 1598년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왜 이순신이 굳이 근접전을 펼치다 전사했는지 그 실마리를 조금이나마 풀 수 있는 기록이 있었다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자료를 분석한 이순신 전문가인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이 자료의 앞장 전문(全文) 83자(字)를 해석한 결과는 이랬습니다. ‘이순신이 선봉에 서지 말라는 부장들의 말을 듣지 않고 일부러 앞장서서 진두지휘를 했다’는 것을 다른 사람도 아닌 서애 유성룡이 기록했다는 것이죠. 이것을 저는,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에서 이순신이 승리를 염두에 뒀을 뿐 자신의 안위는 전혀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결과라고 해석했습니다.
여기서 노승석 소장은 “그 기록에서 새로 밝혀진 중요한 내용이 하나 더 있는데, 웬일인지 문화재청도 여기에 대해 그다지 주목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무슨 내용이었을까요.
우선 이 ‘대통력’은 일종의 달력인데,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 달력의 여백에 현대인이 다이어리를 쓰듯 개인적인 일정과 사건 기록, 병의 처방 같은 사항을 기록했다는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달력의 주인인 서애 유성룡 역시 자신이 어떤 병을 앓았고 무슨 약을 썼는지를 여기에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난중일기’의 첫 완역본을 냈던 노 소장은 조금 뜻밖의 얘기를 했습니다.
“‘난중일기’를 꼼꼼하게 읽어보면 말이죠. 이순신 장군이 전란 중에 상당히 전문적인 약 처방을 받은 얘기가 나옵니다.”
이순신은 바람이 세차게 부는 해안과 해상에서 늘 과다한 업무에 시달렸습니다. 당연히 병이 쉽게 걸리는 여건이었습니다. 몸살, 복통, 위경련, 토사곽란(토하고 설사하면서 배가 아픈 병)을 자주 앓았다는 것입니다. 노 소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판옥선은 해풍이 자주 이는 바다 위에 정박했는데 바람을 막는 것은 고작 뜸 정도였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배에 웅크리고 앉아 ‘온갖 생각에 가슴이 치밀어 오른다’고 일기에 썼죠.”
“뜸이란 게 뭡니까?”
“짚과 띠, 부들로 거적처럼 엮은 것을 뜸이라 하는데 이걸 배에 걸어 창문을 만듭니다. 비와 바람, 햇빛을 막는 역할을 하죠. 이 창문을 선창(船窓)이나 봉창(篷窓)이라고도 합니다.”
‘난중일기’ 계사년(1593년) 6월 18일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른 아침에 몸이 무척 불편해 온백원(溫白元) 4알을 먹었다. 잠시 후 시원하게 설사를 하고 나니 몸이 조금 편안해진 듯하다.”
“온백원이라고요?”
“지금도 사용되는 한방 구급약입니다.” 온백원은 천오포(川烏炮), 파두상(巴豆霜), 적복령(赤茯苓), 조협구, 후박, 인삼을 넣어 꿀로 만든 환약이라고 합니다. 1771년(영조 47년) 서명응이 쓴 일종의 백과사전인 ‘고사신서(攷事新書)’에는 ‘온백원은 심복의 적취와 징벽, 소화불량, 황달, 부종, 심통, 학질 등 일체의 복부 질환에 사용한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복용했다면 상당한 깊이가 있는 처방을 받았다는 얘기가 되죠.
온백원을 복용한 다음 해인 갑오년(1594년) 7월 12일, 이순신은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의 벗이자 후원자인 영의정 유성룡이 갑자기 별세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노 소장의 ‘난중일기 교주본’에선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유상(柳相·유성룡)의 부음이 순변사(왕명으로 변경을 순찰하는 특사)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는 그를 질투하는 자들이 필시 말을 만들어 훼방하는 것이리라. 통분함을 참을 수 없다. 이날 저녁에 마음이 매우 어지러웠다. 홀로 빈집에 앉았으나 심회를 스스로 가눌 수 없었다. 걱정에 더욱 번민하니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했다. 유상이 만약 내 생각과 맞지 않는다면(정말로 별세했다면) 나랏일을 어찌할 것인가.”
결국 유성룡의 별세 소문은 가짜뉴스였음이 밝혀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 헛소문에는 근거가 아주 없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경남 함양의 선비이자 의병장이었던 정경운이 쓴 일기 ‘고대일록(孤臺日錄)’ 갑오년 7월 15일자를 보면 당시 유성룡은 전염병에 걸려 기절했다가 회복했다고 합니다.
유성룡이 기록한 갑오년의 ‘대통력’은 이번에 새로 밝혀진 경자년 문서가 아니라 기존에 알려졌던 자료입니다. 이 문헌의 1594년 7월 24일자 유성룡의 메모에는 “병을 얻어 보중익기탕(補中益氣湯·지라와 위를 보충해 원기를 돕는 약)과 삼소음(參蘇飮·인삼과 소엽 등을 넣어 만들며 감기로 인한 두통·발열·기침에 쓰이는 약)을 복용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7월 28일자 메모는 이렇습니다. “인삼강활산(人蔘羌活散·풍담과 열을 치료하는 약)을 복용하니 땀이 나 열이 내렸다.” 보중익기탕, 삼소음, 인삼강활산의 3가지 처방은 지금도 한의원에서 처방약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임진왜란 당시 구국의 명장 이순신과 명재상 유성룡은 매우 전문적인 한의학 처방약을 복용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그들에게 이런 약을 처방해 줬던 것일까요.
세간에선 이들과 동시대에 살았던 ‘한 인물’이 아니었을까 짐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인물’이라면 충분히,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이순신과 유성룡이라는 대단히 중요한 요인들을 위해 약 처방에 나서지 않았을까.
“그런데…”
“…?”
“이번에 환수된 경자년의 ‘유성룡 비망기입 대통력’에서 마침내 그 이름이 나왔습니다.”
“그게 누굽니까?”
“그 동안 짐작했던 바로 ‘그 사람’이 맞았습니다.”
새 자료의 1600년 6월 7일자에 희미한 초서로 이런 유성룡의 글씨가 적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許浚介藥品唐扇……
뒷부분이 훼손돼 있고 글자 자체를 쉽게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이 일곱 글자는 명백히 이렇게 번역되는 내용이었습니다.
“허준(許浚)이 약품과 중국 부채를 소개해 줬다.”
그렇습니다. 앞서 말한 ‘그 인물’이란 바로 ‘동의보감’의 저자인 구암 허준(1539~1615)이었던 것입니다.
허준은 1545년생인 이순신보다는 6세, 1542년생인 유성룡보다는 3세 연상이었습니다. 이순신과 유성룡이 지금의 서울 중구, 허준은 강서구 출신이니 한강을 사이에 두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자랐던 셈입니다.
1571년 내의원 관직을 얻은 허준은 1590년 왕자의 천연두를 치료한 공으로 정3품의 품계를 받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 임금의 의주 피란길에 동행했습니다. 그러니까 유성룡과 허준은 전란 동안 함께 임금을 보필했던 사이였습니다. 임진왜란 동안 허준은 ‘동의보감’을 집필하면서 다양한 임상 실험을 하는 단계였습니다.
그러나 허준이 유성룡이나 이순신에게 약을 처방했다는 연결고리는 이번 새 자료의 발굴 전까지는 전혀 나오지 않았고, 다만 짐작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유성룡에게 약을 처방해 준 사람은 허준이 맞았습니다.
노 소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서애 유성룡과 절친한 사이었던 이순신 장군이 1593년 구급약으로 복용했던 온백원 역시 명의 허준의 처방일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죠. 물론 이것은 아직까지는 추측일 뿐이지만요.” 이번 자료로 허준과 유성룡의 연결고리는 명확해졌습니다. 이제 허준과 이순신이라는 두 위인의 관계는 점선으로 남겨진 셈입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설명해드립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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