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개발자 “정부 주 69시간 노동 허용, 모든 산업이 ‘판교의 등대’ 될 것”

유선희 기자 2022. 12. 15.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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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단위’ 초과근무 관리안에
IT업계 ‘크런치 모드’ 우려
“몸 갈아넣어 밤샘·야근 반복”

“특정 시기 업무가 몰리는 ‘크런치 모드’가 게임, IT(정보기술)업계가 아닌 다른 업계에도 도입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크런치 모드는 업무시간이 느는 것뿐만 아니라 노동강도도 올라가거든요. 노동강도를 풀었을 때 노동자들이 버텨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초과근무 관리 단위를 ‘주 단위’에서 최대 ‘연 단위’로 바꾸는 정부권고안에 대해 게임업계 개발자 A씨(30대)가 이렇게 말했다. A씨는 15일 통화하며 “사측은 주 52시간제를 의식해왔는데 그 기간을 일주일에 최대 69시간으로 늘려주면 눈치를 덜 보게 될 것이고, 과로 문제는 계속될 것”이라면서 “육체노동이 있어야 하는 업종에서는 노동자 건강도 우려된다”고 했다.

A씨는 게임업계에서 일해온 14년 동안 장시간 노동이 일상이라고 했다. 밤새도록 게임업체 건물 불이 꺼지지 않아 ‘판교의 등대’라고 불린 지역에서도 3년 넘게 일해봤다. A씨는 게임업계에서의 노동을 “갈려 나간다”고 표현했다. 게임 출시 및 업데이트를 앞두고 야근과 밤샘을 반복하는 게임업계 근무방식을 의미하는 ‘크런치 모드’에서, 노동자들은 “자신을 갈아 넣으면서 아이템을 개발한다”는 것이다.

A씨는 “크런치 모드에서 오전 10시쯤 출근해 새벽 3시쯤 집에 들어가곤 했다”며 “이때는 휴일도 평일처럼 일하는 날이 다반사였다. 휴식시간이 별도로 없다”고 했다. A씨에 따르면 회사 일정에 따라 크런치 모드는 제각각인데 이벤트를 진행하기라도 하면 짧게는 한 달, 길게는 1년도 될 수 있다. A씨는 일주일에 최장 100시간 넘게 일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게임, IT업계 노동자는 주로 ‘포괄임금제’로 계약을 맺고 일하고 있어 야간, 휴일에 추가 근무를 해도 수당을 받지 못한다. 기본임금에 수당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장에선 사측이 수당 지급 의무가 없다 보니 ‘주 52시간’ 상한선을 지키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초과근무를 당연하게 여긴다는 비판이 나온다. A씨는 “건강권을 보호하고자 한다면 포괄임금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미래노동시장연구회는 “포괄임금 오·남용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상시 근로감독 실시” 수준의 권고에 그쳤다.

오세윤 민주노총 화섬노조 IT위원장은 “‘크런치 모드’에서 과로사와 과로자살과 같은 비극적인 일이 있었다. 그 때문에 주 52시간 상한제가 시행됐는데 이번 권고는 이를 허무는 것으로, 크런치 모드를 사실상 전 산업으로 확대하는 것”이라며 “초장시간 노동으로 건강을 해친 이후에는 휴식을 취한들 건강이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잠을 몰아서 잘 수는 없다”고 말했다.

건강권 보호 ‘11시간 휴식’엔
“상시 과로 노출 위험 더 커져”

전자산업도 과로 문제는 IT업계와 비슷하다. 최근 5년여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소속 기업의 사업장에서 발생한 질병산재 현황을 보면 질병산재의 13.8%(43건)가 뇌출혈과 심근경색이었고 이 중 25건이 사망으로 이어졌다. 조승규 노무사는 “전자산업 역시 뇌심혈관계 질환이 높게 나타나는데, 정부는 이미 특별연장근로 인가 대상에 반도체 연구·개발을 포함하지 않았나. 이번 연구회 권고안은 과로 업종으로 불리는 곳에서 산재 발생을 더 높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우려된다”며 “건강권 보호로 제시한 ‘근로일 간 11시간 연속휴식’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연구회가 지난 12일 고용노동부에 권고한 안은 ‘일주일 초과근무 12시간’ 제한을 허물고 월, 반기, 분기, 연 단위로 개편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 경우 ‘주 52시간’은 무너지고 ‘주 69시간’ 근무가 가능해진다. 초과근무 12시간은 휴일을 포함해 일주일을 기준으로 한다. 휴일수당을 주고 12시간 초과근무가 가능하다. 휴일수당을 주면서 ‘크런치모드’에 들어간다면 일주일에 80.5시간도 가능하다. 연구회는 “극단적 사례”라고 일축하는데, 현장상황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

한인임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사무처장은 “노동부는 주 52시간을 초과하지 않아도 가중요인에 따라 관련성이 강하면 과로 산재로도 인정하고 있는데, 주 69시간으로 늘어나면 시간은 물론 그만큼 업무강도도 높아져 상시 과로에 노출될 위험이 커진다”며 “가뜩이나 노조 가입률도 낮아 사업장에서 건강권 보호가 제대로 지켜질지도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유선희 기자 y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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