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테러에 항거하다 희생된 숄 남매 [삶과 문화]

2022. 12. 13.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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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 스틸컷. 스폰지 제공

독일 국가사회주의(나치) 테러에 항거하다 희생당한 한스 숄(Hans Scholl· 1918~1943)과 그의 여동생 소피 숄(Sophie Scholl·1921~1943) 및 이 운동을 함께한 학생들의 활동을 독일 밖에서는 잘 모른다. 학생들은 국가테러에 맞서 '백장미'(Weisse Rose·1942년 6월~1943년 2월)라는 비밀조직을 결성해 항거하다 검거되어 사형된 투사들이다. 정의와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려 했고, 그들의 의지와 활동은 시공간을 초월해 오늘날까지 울림을 주고 있다.

과거는 미래로 이어진다. 나치 테러에 투쟁한 백장미단은 독일 학생운동뿐만 아니라 더 나은 정치와 사회 발전을 이끈 큰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독일 시민의 비판적 정신을 강화하고 나치 테러로 희생당한 이웃과 사람들에 대한 사죄 정신으로도 거듭나고 있다.

백장미단은 뮌헨대 학생인 한스 숄과 알렉산더 슈모렐(Alexander Schmorell·1917~1943) 및 그들의 친구들이 주도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구성되었다. 민주주의적 이상을 지향하며 인본주의적 가치에 토대해 전체주의에 항거하는 비폭력 그룹이었다. 뮌헨에서 시작해 다른 레지스탕스 그룹 및 수도 베를린과 반체제 국방군(Wehrmacht·1935~1945) 서클에 이르기까지 접촉을 확장하면서 전쟁 종식을 촉구했다. 숄 남매를 포함해 백장미단 학생들은 1943년 2월 말에서 4월 사이에 검거돼 체포되었다. 그들의 활동은 불법으로 간주돼 모두 사형을 선고받고 숄 남매는 즉각 처형되는 참극을 당했다.

독일은 국가 차원에서 이러한 반나치 저항 운동가들을 기억하기 위해 1970년대부터 추모 행사를 해오고 있다. 국가 사회주의자들이 전파한 공동체 이상을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 숄 남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나치 독재는 갈수록 비인간적으로 변해가면서 인종 학살을 자행했다. 이에 학생들은 분노하며 이를 바로잡고자 했다. 소피는 1943년 2월 22일 오후 사형선고를 받는 법정에서 판사를 향해 '내가 선 이 자리에 당신이 서게 될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들은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고자 했고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해 매우 당당했다.

소피 숄은 어린 시절부터 정치적 청소년 단체 활동에 가담해 강한 정치적 의지를 다졌다. 1934년 히틀러의 독일여성청년단(Bund Deutscher Mädel)에 가입해 1941년까지 활동했다. 이 단체는 나치 정권의 전체주의적 목표에 따라 14세에서 18세 사이의 소녀로 조직된 히틀러 청소년단의 여성지부였다. 소피는 이 그룹에 참여해 분대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나치 이데올로기를 지향하는 청소년 조직에 등을 돌렸고, 한스와 함께 진보적인 독일 청소년 단체에 가담했다. 나치는 이러한 진보 단체를 금지했다. 1943년 히틀러가 유럽 전역에서 전쟁을 계속하자 지하 저항운동은 더욱더 활발해졌고, 숄 남매도 반전을 지지하는 전단지를 작성해 우편물로 보내고 뿌리는 방법을 택했다. 그의 의로운 활동과 죽음은 전쟁 말기 연합군에 알려졌고, 그의 거룩한 항쟁은 영화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Sophie Scholl: The Final Days)'로 거듭났다. 베를린 영화제에서 2005년에 개봉됐다.

숄 남매의 국가테러에 저항하는 활동은 한국의 1970년대 유신 시대에 전단지를 배포하면서 체포, 구금, 고문, 실종되었고, 형 집행을 강제당했던 것과 비슷하다. 숄 남매의 저항운동이나 본회퍼 목사 등의 히틀러 암살시도처럼 독일에선 반나치 운동이 치열했다. 반면 일본은 어떠했는가? 히로히토와 군부에 대한 항거는 기록으로 거의 찾아볼 수 없지 않은가? 이러한 역사적인 차이점은 같은 추축국 독일과 일본 사이에 크게 드러난다. 일본은 패전책임 흔적을 지워버리고 중고 교과서마저 수정해버렸다. 전후처리 책임 문제를 역대 일본 정부는 외면하고 있고 일본 내의 전후 사죄 활동은 찻잔 속의 파도처럼 미미하다.

김해순 유라시아평화통합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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