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소프트 쿠데타
페루 헌정사에 기록된 쿠데타는 알베르토 후지모리(1990~2000년 재임·수감 중)의 1992년 ‘셀프 쿠데타’가 마지막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임기를 못 마치고 물러나거나 끌어내려진 대통령들로 넘쳐난다. 특히 2018년 이후 지금까지 6번째 대통령을 맞았다. 이 가운데 2명만 선거를 통해 선출됐다. 무장력을 동원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엄밀한 의미의 ‘쿠데타’는 아니지만 ‘사실상의 쿠데타’가 일상화된 정치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 임기를 4년 가까이 남겨둔 페드로 카스티요(53)가 지난 7일 의회에서 탄핵당하며 페루의 정치적 불안이 깊어지고 있다. 의회는 카스티요를 탄핵하며 그가 ‘셀프 쿠데타’를 시도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카스티요가 의회를 위헌적으로 해산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하려 했다는 것이다. 페루 헌법상 대통령은 의회 해산권을 갖는다. 다만 의회가 두 번 연속 총리를 불신임할 경우에 국한되는데, 이번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법적으로는 탄핵에 문제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이를 두고 미국 뉴욕타임스는 페루의 불안정성을 우려하면서도 그나마 ‘복원력 있는’ 민주주의의 모습을 보였다고 평가했다.
반면 카스티요 측은 의회의 대통령 탄핵이 ‘소프트 쿠데타’라며 맞서고 있다. ‘소프트 쿠데타’는 무력을 동원하지는 않되 제도화된 기득권을 이용해 지도자를 끌어내린다는 의미다. 소작농의 아들로 교사 출신인 카스티요는 사회주의 노선을 기치로 대통령에 당선된 뒤 1년 남짓 재임하며 의회와 여러 번 충돌했다. 의회는 검찰 수사를 앞세워 지난해 12월, 올해 3월 두 차례 그를 탄핵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각각 ‘여당의 불법 자금 조달’ ‘만연한 도덕적 무능’이 사유였다. 카스티요 측은 대통령 본인의 범죄 혐의가 확인되지 않은 데다 ‘도덕적 무능’처럼 애매모호한 헌법 규정으로 탄핵한다는 것이 가당찮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세 번째 시도 만에 탄핵안은 통과됐고, 그 빌미는 의회 해산 시도로 급발진한 카스티요가 제공했다.
보수적 정책들을 보면 페루 의회가 기득권에 장악됐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을 수 있다. 반면 대중은 단번에 무언가 해결해줄 지도자를 찾는 경향이 있다. 그 사이에서 페루의 대의민주주의는 뿌리내리지 못하고 혼란을 거듭한다.
손제민 논설위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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