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전 칼럼] 당신이 아직 살아 있다면 당신은 ■다

한겨레 2022. 12. 13.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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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전 칼럼]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은 틀렸다. 지금 이 시간 연약한 존재들을 가장 잔혹하게 죽이고, 파괴하고 있는 것은 모두 살아 있는 이들이다. 인간이 지구라는 행성 파괴의 주범인 ‘인류세’, 강자가 약자를 도륙하는 것을 능력이라 부르는 ‘우생세’라는 ‘반동의 시대’엔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죄가 된다.
영화 <붉은 돼지> 스틸컷.

신영전 | 한양대 의대 교수

당신이 아직 살아 있다면 당신은 ■다. 늙지도 못하고 죽는 이들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다이아몬드를 생산하는 시에라리온은 평균 수명이 40살에 미치지 못하고, 우리와 같은 유전자를 가진 북한 주민의 평균 수명은 73살로 우리보다 11년이나 짧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아이들이 배고파 일찍 죽어가는데, 당신이 40살을 넘었거나 73살보다 오래 산다면 당신은 ■다.

지난 2월 멕시코 신문기자 안토니오 데라크루스(47)는 집을 나서다 총에 맞아 죽었다. 매년 100명 내외의 기자들이 권력에 의해 살해·실종된다. 당신이 불의한 정권으로부터 위협받지 않는 기자라면, 하물며 “대통령 파이팅!”을 외친다면 당신은 ■다.

기독교 탄압이 극에 달하던 시절, 병사들은 신도 색출을 위해 잡혀온 이들에게 성화를 밟게 했다. 거부한 이들은 죽고 성화를 밟은 자는 살아남았다.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하느니라” 했던 성화 속 인간 예수도 죽었다. 하지만 지금 화려한 교회당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고급 자가용차 뒷좌석에서 내린 죽지 않은 자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다.

예수회 사제들은 이탈리아 철학자인 조르다노 브루노가 지금은 사실이 된 지동설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그의 턱에 쇠로 된 재갈을 물리고, 쇠꼬챙이로 혀와 입천장을 뚫은 뒤 발가벗겨 화형에 처했다. 1000년간 신성불가침으로 여기던 갈레노스의 의학 저술에서 적어도 200개 이상의 잘못을 찾아낸 근대의학의 아버지 베살리우스의 책은 수없이 불살라졌다. 부패한 정권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책들을 모아 불태울 때, 그 책 목록에 자기 책이 없는 것을 알고는, 권력자에게 “나를 태워라”는 편지를 쓰는 학자를 이제 대학 안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박노자의 말처럼, 위험하지 않은 학문은 이미 죽은 학문이다. 이른바 잘나가는 교수들의 상당수가 정부, 영리 기업, 심지어 방산 기업에서 연구비를 받는다. 국방기술진흥연구소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무기 수출 순위 세계 8위, 성장률 1위 국가가 되었다. 전세계 무기 수출 점유율 39.0%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1위 국가 ■처럼, 이제 우리나라도 전쟁이 없으면 부추기기라도 해야 경제가 잘 돌아가는 국가가 되었다. 그 전쟁무기 기술자를 키워내는 곳이 다름 아닌 대학이라는 것이 무섭다. 죽은 이들의 피 묻은 돈이 거액의 연구비로 전환되고 이 연구비로 급료를 받는 젊은 연구원들은 이 시간에도 교수 대신 유명 학술지에 논문을 쓰느라 밤을 새운다. 부패한 권력에 위협을 가하지 않는 대필 논문과 거액의 연구비 수주로 학계와 학교로부터 칭송받으며 살아가는 교수라면 당신은 ■다.

지난달 30일 대법원은 쌍용차 노조 30억원 배상 청구 소송을 파기하고 서울고법으로 환송했다. 늦게나마 다행이지만 이미 30명의 해고자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삼성 계열사에서 일하다 죽은 직업병 환자가 118명을 넘어섰지만, 가해자들은 아주 ‘건강하게’ 살아 있다. 하루 2~3명의 노동자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전세계 산재사망률 부동의 1위를 오랫동안 지키고 있는 나라에서 가해자들은 중대재해처벌법을 없애달라 비싼 양주잔을 돌리고, 정치가들은 이들과 어깨동무를 한 채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고 있다. 기억하라! 이들은 모두 살아 있는 자들이다.

태권도 사범을 꿈꾸던 경빈이, 슈퍼스타가 되어 효도하겠다던 예진이와 250여명의 어린 친구들, 그리고 2년 반 기다린 취업 문자를 받았던 상은이, 배우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퇴근 뒤에도 연습실에서 무용 연습을 하던 지연이, 하루 12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하며 유학을 꿈꿨던 가영이 등 158명 젊은이들의 꿈은 깊은 바다에 가라앉고 이태원에서 멈추어 섰지만 책임자들은 아직도 당당히 살아 있다. 내가 죽고 네가 산다면, 산 자들이 죽고 죽은 너희들이 산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좋아지지 않았을까?

“날지 못하는 돼지는 그저 돼지일 뿐이다.”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고, 노동자를 적으로 돌리며, 자신의 정권 안위와 공천권만을 좇는 정치인들은 살아 있는 ■일 뿐이다.

10여년 전 방문한 광주 5·18 추모관 벽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힌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나는 5월20일날 도망갔습니다. 미안합니다(전남대 77학번 ○○○).” 난세에는 도망가는 게 사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미워하지도 않는 살아남은 자는 그저 ■일 뿐이다.

좋은 벗들의 부고가 늘 먼저 온다. 그래서 영화 <붉은 돼지>의 주인공은 “좋은 놈들은 모두 죽고, 인간은 중년이 지나면 ■가 된다”고 읊조렸나 보다.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은 틀렸다. 지금 이 시간 연약한 존재들을 가장 잔혹하게 죽이고, 파괴하고 있는 것은 모두 살아 있는 이들이다. 인간이 지구라는 행성 파괴의 주범인 ‘인류세’, 강자가 약자를 도륙하는 것을 능력이라 부르는 ‘우생세’라는 ‘반동의 시대’엔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죄가 된다. 아직도 살아 있는 나와 당신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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