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양심을 위한 평화

한겨레 2022. 12. 13.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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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018년 4월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퐁니 사건의 생존자 응우옌티탄(왼쪽)이 19일 오전 국회에서 당시 상황을 증언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오른쪽은 하미 사건 생존자 응우옌티탄. 두 사람은 동명이인이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기고] 도안홍레 | 베트남 다큐멘터리 감독

“2022년 12월5일, 서울 회담 이후 응우옌쑤언푹 베트남 국가주석과 한국의 윤석열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열고 양국 관계를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는 데 합의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는 향후 베트남과 한국의 협력 관계를 크게 확대하는 기회를 열게 된 계기라는 점에서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이 뉴스를 내가 만드는 다큐멘터리 프로젝트 <평화로 가는 길>의 지난 8월 촬영 장면을 보고 있을 때 접했다. 1968년 퐁니·퐁녓 학살 사건에 대해 한국 정부에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국가배상소송을 진행 중인 베트남의 민간인 학살 피해자인 원고 응우옌티탄은 지난 8월 방한 당시 한 기자회견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현재 베트남과 한국의 관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탄은 답변했다. “저는 2000년 이전에는 한국에 대한 증오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여러 한국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위로를 받았고 제 고통도 많이 누그러졌습니다. 지금 저는 그들을 나의 친구들이라 여깁니다.” 재판 준비 과정에서 원고 쪽 변호인은 탄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법정에서 이런 질문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현재 베트남과 한국의 관계가 매우 좋은데 학살 피해는 매우 오래전 일이다. 어째서 그리고 무엇을 위해 당시의 일을 이렇게 들추고 파내야만 하는가?’” 탄은 자신이 가는 길이 옳다고 믿는 사람이 낼 수 있는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한국 정부가 자신의 군인이 저지른 퐁니 마을 학살 사건을 인정한다면 두 나라 관계가 더욱 좋아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전후 태어나 베트남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다. 전쟁 당시 한국군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종군기자였던 나의 아버지에 대해 들은 이야기 정도였다. 그러나 이 주제에 대해 깊게 파고들면서 나는 비로소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의 고통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 한국군의 마지막 발자취도 사라졌고, 올해는 베트남과 한국 수교 30년이다. 이 30년 동안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이 우리 베트남을 오가고 일을 하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여행도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젊은 세대는 케이팝과 한국의 이미지들에 환호하지만 아주 소수는 과거 두 나라의 굴곡지고 처참한 만남에 대해 알고 있다. 물론 한국군에 관한 노년층의 그러한 기억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지만 매년 정월 베트남 중부의 여러 마을에서 열리는 ‘따이한 제사’(한국군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을 기리는 제사)와 같은 집단기억 속에는 당시의 어두운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다.

5년 전 서울의 현충일 추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공훈자’들의 명예를 이야기했고 베트남 외교부는 하노이의 한국대사관에 ‘엄중한 외교적’ 연락을 취했다. “우리는 한국 정부가 베트남 국민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양국 우호와 협력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언행과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을 요청한다.” 전쟁이 오래전에 끝났으니 베트남 사람들은 과거를 잊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베트남 사람들은 과거를 잠시 닫은 것이지 잊은 것은 아니다. 한국군에 관한 베트남 사람들의 마음과 기억은 깊고 복잡하며 그 상처는 시간과 더불어 흉터로 남았고 계절과 기후가 변할 때마다 온몸이 쓰라린 고통이다.

응우옌티탄과 퐁니·퐁녓 마을 주민들은 2023년 1월 중순에 있을 국가배상소송 1심 선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곧 학살 55주기와 따이한 제사도 맞이한다. 그들에게 승소는 학살 사건으로 희생된 영혼들을 위로하는 것뿐만 아니라 반세기 넘게 길어지고 있는 과거의 고통을 그들의 바람대로 닫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진실과 양심, 그리고 인간의 품격이 승리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러해 동안 응우옌티탄과 한국의 시민사회는 인내하며 이번 소송을 함께해왔다. 이번 재판은 단순한 법정 투쟁이 아니라 양쪽이 공감과 연대를 통해 만나는 것이기도 했다. 아마도 그것은 이번 소송이 우리 인류가 추구해온 보편적인 가치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두 나라 사이 평화는 바로 우리의 양심을 위한 평화여야 하며 그래야 비로소 인도적이고 아름다운 평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 과거를 갖고 있으며 그 과거를 바라보는 눈동자 속에는 미래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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