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화 칼럼] `빨리빨리` 깎아내리는 건 자살골

2022. 12. 1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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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화 논설실장

주52시간으로 묶인 근로시간을 월·분기·반기·연 단위로 기준을 정해 연장근로를 허용하자는 미래노동시장연구회의 권고안은 잃어가는 노동현장의 '속도'를 돌아보게 한다. 한국을 선진국에 올려놓은 '빨리빨리' 노동문화는 1인당 GDP 2만 달러 달성 시점(2006년)부터 흐려지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는 물량 위주의 목표지상주의라는 부작용을 낳았지만 부의 원동력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생산요소 투입만으로는 선진국 진입이 어렵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총요소생산성이 대두했고 노동의 양적 투입은 '무지한 행위'로까지 치부됐다. 더 큰 문제는 이때부터 노동현장에 '꾀'가 개입했다는 점이다.

노동을 인간의 굴레라고 보는 건 신화다. 노동이야말로 인성(人性)의 본질이다. 그 노동에 사심이 깃들면 사회는 망가진다. 헤시오도스는 2800년 전에 그 점을 간파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히 수행한 후 상응한 대가가 주어지는 것이 정의'라고 했다. 주어진 일을 하지 않거나 한 것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바라는 건, 그에 따르면 불의다. '빨리빨리 노동'은 한 것보다, 투입한 것보다 더 많은 결과를 내놓았기에 정의롭다 할 수 있다. 서두르면 대충대충에 빠질 우려가 있다곤 하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속도를 높이면 긴장도는 올라간다. 팽이처럼 더 똑바로 서서 돌아간다. 흐르는 물에 이끼가 끼지 않는 것처럼 잡념과 부패도 발붙이기 어렵다.

화물연대 파업은 감속시대의 민낯이다.(하기야 안전운임제는 속도를 낮추는 제도다) 덜 일하고 더 많이 얻겠다는 것이 화물연대의 의도였다. 더 일하고 더 받겠다는 것이 상식이다. 이를 화물연대에 적용하면 더 안전하게 운송하면서 수입은 보전되도록 해달라고 해야 하는데, 안전은 그대로인데 속도는 늦추겠다는 것이니 설득력이 없었다. 더 일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일의 능률이 착안되고 생산성으로 이어진다. 그렇지 않고 무대포로 덜 일하겠다고 하니 법과 원칙 앞에 힘 쓸 수가 없었다.

우리사회에 이러한 '노동 정의'에 반하는 꼼수가 갈수록 고개를 들고 있다. 그 한가운데 최대 이권단체 민노총이 있다. 대기업과 공기업 정규직 노동자 중심의 민노총은 기득권을 틀어쥐고 노동 현장의 속도에 브레이크를 걸어왔다. 산업화 시대를 지나오며 정경유착의 원죄를 쌓은 자본은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그들의 주장을 쉽게 들어줬다. 거대 조직화된 대중 조직에 정치적으로 동질성을 지닌 민노총을 우군으로 삼은 좌파 정부들도 그들의 불법을 방조했다.

한국경제는 이 빨리빨리 긴장을 버리면서 나태해지고 때가 끼기 시작했다. 주요 선진국 대비 단연 최고의 노조 파업률, 세계 최강의 강성 노조, 규칙제정자인 정치의 유실(流失)과 무기력이 한국인 유전자 속의 속도본능을 붙들어매려 하고 있다. 급기야 민노총의 주문으로 문재인 정부가 도입한 주52시간근무제는 노동을 변질시켜버렸다. 말이 좋아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지 그 혜택을 누리는 사람은 공무원, 화이트칼라 등 소수에 그친다.

오후 6시 이후면 거리에 인적이 드물어지고 가정이 북적거리는 것이, 그렇지 않을 때와 비교해 과연 얼마나 개인과 사회에 효용의 증대를 가져올까. 더군다나 주52시간제는 저소득층의 계층상승 사다리를 걷어차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연장근무시간에는 평시보다 1.5배 이상의 임금을 받는다. 일률적으로 더 일하지 말라고 강제하니 연장근로를 통해 수입을 늘리려는 중산층 이하 사람들은 부의 축적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

주52시간근무제는 빨리빨리 노동, 물량 투입의 노동이 저급한 것이라는 편견의 산물이다. 우리의 특질인 '빨리빨리'를 깎아내린다. 그건 자살골이다. 연장근로 적용의 기간 단위를 최장 연간으로 설정한 건 '노동의 인성'에 맞는 조치다. 헤시오도스는 '노동과 나날'에서 제우스의 말을 빌려 말한다.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두는 삶을 찬양하라.(…) 노동은 게으름에 굴욕감을 준다. 마음속에 풍요로움이 가득하다면, 열심히 일하고 뭐든 만들어라. 생산에 대해 생산적으로 생각하라."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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