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자유전 실천한 ‘아나키스트’이자 시민운동의 지주셨죠”

한겨레 2022. 12. 12.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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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 월 29 일 우리나라 ' 1 세대 자유사회(아나키즘)운동 '의 마지막 증인인 박승한 선생님이 소천하셨다 . 향년 97. 일제강점기 청년기 , 강제징용과 기적같은 생환 , 해방정국에서 임시직 공무원 , 한국전쟁 이후 늦은 대학 진학과 자유사회운동 , 농촌 · 농민운동 , 탄압에 의한 미국 이민과 5 년만의 귀국 , 1990 년대 시민운동 등등.

박 선생님은 1951년 피난 중에 대전의 한 고서점에서 구입한 <크로포트킨 전집> 을 읽고 아나키스트로 살고자 결심했고, 청년시절부터 경자유전의 원칙을 실천하셨다 . 1953 년 서울대 사대 지리학과에 재학중이던 선생님은 조부로부터 대지 1643㎡(5천평) 와 전답 4만7049㎡(1만4천여평), 약간의 임야를 상속받았는데 그 가운데 조부로부터 물려받은 농지 8766㎡(약 2700평) 를 소작인들에게 무상 분배해주었다 . 선생님은 이정규·정화암 선생 등과 함께 1962년 재발족한 자유사회공동체운동단체 '국민문화연구소'의 창립회원이자 말년까지 고문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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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가신이의 발자취] 고 박승한 춘천경실련 초대 공동대표를 추모하며
지난달 별세한 고 박승한 춘천경실련 초대 공동대표. 춘천역사문화연구회 제공

지난 11월 29일 우리나라 ‘1세대 자유사회(아나키즘)운동’의 마지막 증인인 박승한 선생님이 소천하셨다. 향년 97. 일제강점기 청년기, 강제징용과 기적같은 생환, 해방정국에서 임시직 공무원, 한국전쟁 이후 늦은 대학 진학과 자유사회운동, 농촌·농민운동, 탄압에 의한 미국 이민과 5년 만의 귀국, 1990년대 시민운동 등등. 박 선생님의 일대기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살아 있는 역사이셨다.

박 선생님은 1951년 피난 중에 대전의 한 고서점에서 구입한 <크로포트킨 전집>을 읽고 아나키스트로 살고자 결심했고, 청년시절부터 경자유전의 원칙을 실천하셨다. 1953년 서울대 사대 지리학과에 재학중이던 선생님은 조부로부터 대지 1643㎡(5천평) 와 전답 4만7049㎡(1만4천여평), 약간의 임야를 상속받았는데 그 가운데 조부로부터 물려받은 농지 8766㎡(약 2700평) 를 소작인들에게 무상 분배해주었다. 선생님은 이정규·정화암 선생 등과 함께 1962년 재발족한 자유사회공동체운동단체 ‘국민문화연구소’의 창립회원이자 말년까지 고문으로 활동했다. 1973년에는 농촌운동지도자협의회의 초대회장으로서 상속받은 전답 중 상당수를 매각해 활동비로 내놓았다. 자전 기록 문집 <북한강>(2010)을 보면, 이렇게 매각한 전답만 3만2151㎡(약 1만평) 에 이르러 재산의 70% 를 농촌농민운동에 쾌척한 셈이다.

지난 2015년 국민문화연구소 원로 회원들이 박승한(앞줄 가운데) 고문의 자택을 방문했을 때 함께한 모습이다. 국민문화연구소 제공
왼쪽부터 일제강점기 아나키스트이자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박열 열사와 일본인 아내이자 동지 가네코 후미코(오른쪽). 박열의사기념관 제공

박 선생님은 1973년 경북 문경 박열의사기념공원에 세운 김문자(가네코 후미코) 여사의 묘비 건립위원 중 유일한 생존자이기도 했다. 영화 <박열>(2017)을 통해 널리 알려진대로, 가네코는 아나키스트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열 의사의 일본인 부인이자 동지로, 불령사를 조직해 관동대지진 직후 일왕 부자를 암살하려 했다는 조작 사건으로 구속되어 1926년 23살 이른 나이에 옥중 사망했다.

박 선생님은 땅을 무상 배분한 이래 정보기관으로부터 공산주의자로 몰려 취조를 받았고, 일본에서 들여온 아나키즘 책을 불순사상이란 이유로 압수당하는 등 수십년동안 시달려야 했다.

대학 졸업 뒤 서울의 청운중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한 선생님은 고향 춘성중으로 전근을 요청했지만 아나키즘운동을 반체제운동으로 재단한 독재정권에 의해 끝내 교편을 접어야 했다. 그나마 국민문화연구소 초대회장인 이정규 박사가 원주의 장일순 선생에게 부탁해 대성고에서 한동안 재직할 수 있었다.

박 선생님은 1973년부터 전국농촌운동자협의회 초대회장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농민운동을 이끌었고, 1980년에는 전국농민대회의 준비위원장을 맡아, 전국농민단체 주최 ‘헌법 및 농림법령 개정 공청회’를 여러차례 열기도 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이 출범한 뒤 또 다시 핍박이 가해졌고 박 선생님은 결국 1986년 망명과 다름없는 미국 이민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1992년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귀국한 선생님은 시민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1993년 창립한 춘천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초대 공동대표로 활동하며 춘천지역 시민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지난 2010년 박승한 선생이 자전적 기록문집 ‘북한강’ 출판기념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춘천역사문화연구회 제공
지난 2017년 1월 박승한(맨 가운데) 선생과 세배 인사를 온 춘천역사문화연구회 회원들이 선생의 자택 앞에서 함께했다. 맨오른쪽이 필자 오동철씨이다. 춘천역사문화연구회 제공

박 선생님은 수많은 기고를 통해 자유사회운동과 농업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소논문 ‘단재 신채호 선생의 사상과 역사학’ , ‘ 마을주의 ’, ‘ 의료보험조합 운동 ’, 선진국의 책임인 기후위기 원인을 지목한 ‘ 낭비의 죄 ’, 서울집중화의 문제 ‘ 서울유감 ’, ‘ 의암댐의 부당성 ’, 민주화 시대를 진단한 ‘ 한국정치의 전환기 ’, ‘ 민주 지식인의 자세 ’ 등 혜안과 냉철한 진단이 돋보이는 글도 남기셨다. 일어에 능통하셨던 박 선생님은 말년까지 춘천역사문화연구회의 고문으로 활동하셨다. 2013년부터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강원도세요람 · 춘천풍토기> 를 번역해 역사학도들의 필독서로 남았고, 2017년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생산 공문서> 번역 발간과 일제강점기 철원수리조합 관련 문서 번역에도 매진하시어 지역사 연구에 큰 도움을 주셨다.

지난해 7월 김문자 여사 묘소에 다녀오시고 싶다는 박 선생님의 마지막 말씀을 이행하지 못한 후회가 너무나 크다. 아직도 하실 일이 많은 선생님을 편하게 놓아 드리기 힘든 마음이다. 미련을 쉽게 떨어내지 못하는 후배로서 박 선생님의 일생에 생채기를 더하는 글 몇 줄로 추모하는 핑계를 삼으려니 낯부끄러움을 숨길 수 없다 . 늘 동지라고 불러 주셨던 박 선생님께 용서를 구할 뿐이다.

오동철​/춘천시민사회단체네트워크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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