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부 부인에서 독립운동가로 … 육필로 증언한 삶과 투쟁

김신성 2022. 12. 12.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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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기념관 특별전 ‘나는 이은숙이다’
우당 이회영의 아내이자 평생의 동지
일제에 맞서 해방의 길 걸어간 이은숙
압록강 넘나들며 쓴 ‘서간도시종기’에
신흥무관학교 설립 둘러싼 이야기 등
당대 생활 언어로 치열했던 일상 묘사
꾸밈·과장 없는 보고문학의 표본으로

‘경술년 12월 30일 대소가가 압록강을 넘어 떠났다. 우당장은 며칠 후에 오신다고 하여 내가 아이를 데리고 떠났다. 신의주에 도착하여 몇 시간 머물다가 새벽에 안동현에 도착하니….’(1910년 서간도로 망명하다)

‘둘째 영감께서는 항상 청년들의 학교가 없어 염려하시다가 토지를 사신 후에 급한 게 학교라, 춘분 후에는 학교 건설을 착수하게 선언을 하시고, 지단 여러 천 평을 내놓으시고, 아우님 오시기를 기다리셨다…. 우당장은 학교 간역도 하시며 학교 이름을 신흥무관학교라 하였다.’(신흥무관학교를 세우다)
‘서간도시종기’를 쓴 여성독립운동가 이은숙. 이회영기념관 제공
‘10월 20일 오전 4시쯤 마적떼 5,60명이 총을 들고 들어오는 것을…. 내가 그 총에 좌편 어깨를 맞아 쓰러지고 둘째 댁 영감은 마적에게 납치당하였으니….’(총 맞고 일어서다)

여성독립운동가 이은숙이 쓴 ‘서간도시종기’의 일부다.

대필이나 구술이 아닌, 독립운동가가 직접 쓴 육필수기는 손에 꼽을 정도다.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는 육필본이 있는 귀한 사례다. 이은숙이 적은 ‘서간도시종기’는 여성독립운동가의 육필본으로는 유일하다.

‘서간도시종기’는 망실되었던 독립운동사 한 영역과 고난에 찬 역정을 되살려냈다. 신흥무관학교 설립 앞뒤 사정과 이회영 6형제의 활동 궤적은 이 수기를 통해 살아있는 역사가 되었다.

서간도는 백두산 왼쪽으로 압록강을 따라 신의주 건너편 단둥까지 이어진 지역이다. 시종기란 시작과 끝을 적었다는 뜻이다. 이은숙이 베이징, 톈진, 상하이, 서울 등 활동한 다른 지역을 따로 언급하지 않고 굳이 서간도를 제목에 내세운 것은 신흥무관학교 설립과 운영의 중요성을 기록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간도시종기는 장한 영웅담이나 호방한 후일담이 아니다. 당대의 생활언어로 투쟁 활동과 일상의 삶을 담담하게 적고 있다. 이는 다른 독립운동가의 수기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내용들이다. 서간도시종기는 독립운동가들이 하루하루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보고문학인 셈이다.

이은숙은 근대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다. 서울로 돌아와 활동하기 전까지 그는 일제치하에서 일본어 영향 아래 언어를 익히거나 사용한 적이 없다. 서간도시종기 문장이나 어투는 전통 사대부 집안의 생활어 문체라는 점에서 독립운동 기록과는 또 다른 가치를 지닌다. 서간도시종기 전체에서 멋을 부리는 수식어나 가식적인 꾸밈말, 과장된 형용사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독립투쟁 노정이 강건했기 때문일 테지만 기록자 이은숙의 내면 또한 단단했고 사고는 체계적이었다.
서간도시종기. 유일한 여성독립운동가 육필본이다. 당대의 생활언어로 투쟁 활동과 일상의 삶을 담담하게 적고 있다.
사실 독립운동가들이 직접 손으로 써서 기록을 남긴 일은 흔치 않다. 투쟁 활동을 벌이며 기록을 남기는 일은 자신뿐 아니라 동지들 목숨까지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들은 회의나 모임이 끝나면 대개 기록을 불에 태워 없앴다.

상당수 독립운동가는 일제강점기에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기록을 남길 수가 없었다. 수기를 쓴다는 것은 광복 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살아돌아온 독립운동가들도 대부분 제대로 된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당장 눈앞의 일에 매달려야 했던 탓도 있지만 독립운동이 그다지 높게 평가받지 못한 사회분위기도 크게 작용했다. 광복 직후 기록을 남긴 이들은 대개 정치활동을 하는 경우였다.

이은숙은 할아버지 형제이자 지아비의 동지였던 해관 이관직과 대화를 나누며 글을 써내려 갔다. 이관직은 우당 이회영과 이은숙에게 부부의 연을 맺어준 인물이다. ‘우당 이회영 선생 실기’를 펴낸 이관직은 서로 기억과 기록을 맞춰보는 데 도움이 되는 처지였다. 이관직은 신흥무관학교에서 무장투쟁을 지도하는 교두였다. 그러나 서간도에서 칼을 들고 말 달리던 기세와 3·1운동을 이끈 지도자 이관직은 광복된 조국에서 정작 나랏일에 소임이 없었다. 친일파와 분단주의자들이 활개치는 세상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옛 동지들이나 후손들을 찾아보는 일이었다. 여느 독립운동가들의 운명이 그러했다.

이은숙. 그 시절 이 같은 이름을 가진 여자는 흔치 않았다. 공주에서 서울로 올라온 은숙은 경반(서울 양반)과 서양식 혼례를 올렸다. 그는 정작 은숙으로 사는 게 무엇인지 몰랐다. 지아비를 따라 사는 필시 조선 여인이었다. 그가 이은숙이 된 것은 어느 해 가을이거나 춘삼월이 아니다. 하루아침에 문득 이은숙이 된 게 아니었다. 아무도 그에게 이은숙으로 살라고 하지 않았다. 일제와 싸우면서 비로소 그는 자신을 발견해 가고 있었다.
머리를 뒤로 쪽지은 이은숙이 손주를 안고 있다. 두 손주는 사진을 찍으려는 듯 이발을 한 모습이다.
배곯는 서간도 긴 겨울밤 옥수수 한 줌 속에서도 적과 동지를 가려낼 수 있었던 건 우연이 아니었다. 서울로 돌아와 고무신 공장을 다니면서도 똑바로 걷고자 하는 마음이 더 곧게 된 건 고난이 그에게 알려준 노선이었다. 침략자와 밀정을 처단하는 다물단 투사를 아들로 둔 어머니 노릇도 그를 단련시켰다. 국경을 넘고 적탄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노정을 헤쳐나가면서 그는 ‘이은숙’이어야 했다.

그는 굳건히 이은숙으로 서 있어야만 했다. 그가 이은숙일 때 길이 보였다. 아내의 길은 이내 해방의 길, 조국의 길로 좌표를 잡았다.

특별전 ‘나는 - 이은숙 - 이다’는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부인’으로서가 아닌 또 하나의 ‘독립운동가’ 이은숙의 삶을 조명한다.

‘빨래를 해서 잘 만져 옷을 지어주면 여자 저고리 하나에 30전, 치마는 10전씩 하고, 두루마기는 3, 4원 하니 두루마기나 많이 있으면 입양이 넉넉하겠지만 두루마기가 어찌 그리 있으리오. 매일 빨래하고 만져서 주야로 옷을 지어도 한 달 수입이란 겨우 20원가량 되니, 그도 받으면 그 시로 (베이징에) 부쳤다.’(삯바느질로 총을 사다)

서훈을 받은 독립운동가 1만7644명 중 여성독립운동가는 607명에 불과하다. ‘누구 누구의 부인’ 등 남성 중심 기록과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저평가 탓이다. 이번 특별전은 내년 10월31일까지 서울 중구 이회영기념관에서 열린다.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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