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수연의 사각지대] "럭비인들은 어디로..." 철거되는 럭비구장, '생태보호구역'이 대체부지?

권수연 기자 2022. 12. 12.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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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럭비구장에서 경기를 치르고 있는 럭비선수들의 모습, 대한럭비협회 

(MHN스포츠 권수연 기자) "럭비인들이 목소리를 내도 들어주지 않으니 답답합니다" 

한국에 럭비가 도입된지 꼭 100년이 됐다. 초창기 대한럭비축구협회로 시작된 한국 럭비는 현재 산하 14개의 시도협회로 운영되고 있다.

한국에서 사실 럭비의 위상은 그리 높지 않다. 통칭 '비인기종목'으로 불린다. 그러나 그 아래서는 조금이라도 성적을 내기 위해 피땀을 흘리는 선수들이 있다.

대개 조금이라도 좋은 환경에서 럭비를 하기 위해서 해외로 진출하기에 순수하게 국내에서만 뛰는 선수들이 귀한 판국이다. 그만큼 럭비에 대한 인지도와 지원은 열악하다. 더러는 직장과 럭비를 병행하며 체육대회에 출사표를 던지기도 한다. 

지난 해 열린 2020 도쿄 올림픽에서는 국내 럭비 도입 96년만에 올림픽 진출에 성공하며 국민들에게 조금씩 인지도를 넓혀가고 있다. 최근에는 청소년대표팀이 아시아 U-18 대회에서 우승컵을 들며 잠재력을 증명했다.

하지만 한국에는 사실상 럭비 전용구장이 거의 없다시피하다. 10여년 전 지어진 인천 남동아시아드럭비경기장을 제외하면 경기장을 찾기 위해서는 머나먼 전남 강진, 강원도 영월, 경북 경산까지 가야한다. 수도권 럭비인들에게는 접근성이 가장 뛰어난 서울 럭비구장이 사실상 유일한 성지다.

서울 럭비구장은 구로구 온수동에 지어진 국제 규격(약 1만6,263평)의 경기장으로 아시아 최대 규모 크기로 꼽힌다. 해당 럭비구장은 40여년이 넘는 세월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구장은 일신제강(현 KG동부제철) 창업주인 고(故) 주창균 회장이 설치했다. 

소유주는 현송교육문화재단으로, 관리비 부담으로 인해 해당 부지를 지난 해 7월 서해종합건설에게 약 5천500억에 매각했다. 현재는 럭비구장의 예전 모습은 볼 수 없고 개발을 위해 펜스가 둘러져있는 상태다. 

[사진=서울시 국민신문고]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도시계획시설인 체육시설(럭비구장)은 관련 법규 및 지침에 따라 대체부지 확보와 시설까지 모두 확정된 후 해당 부지에 대한 세부개발수립 시 도시관리계획결정 변경 절차를 통해 용도폐지 허가에 준하는 결정이 나야한다.

그러나 본지 취재 결과 구장은 대체부지 확보가 이뤄지지 않은 채 지난 4월 불법철거가 이뤄진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대한럭비협회가 서울시 측에 럭비구장을 원상태로 유지관리(원상회복)할 것을 요구한 정황이 있다. 

또 하나 문제인 점은 번개에 콩 볶듯 대체부지로 제시된 장소다. 국가기반시설로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에 따른 방재시설, 한 마디로 국유지인 '신구로유수지 생태공원'이 거론된 것이다. 오는 2030년 이후 저류조 설치 및 배수펌프장 부지 증설이 계획되어있어 전문체육시설의 개발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또한 집중폭우가 내릴 경우 최고 6미터에 달하는 수위가 올라와 정상적인 경기 개최 및 사용이 아예 불가능한 곳이다. 

또한 구로구청의 온수동 럭비구장(특별계획구역) 복합개발 추진안을 살펴보면 "우리구 관내 신구로유수지, 은평구 진관동, 구리시 인창동에 대체부지 대상지를 검토하고 있으나 어려움이 있다"는 사항이 쓰여있다. 

온수동 럭비구장(특별계획구역) 복합개발 추진안, 구로구청 
서울시가 럭비구장 대체부지로 제시한 신구로유수지, 지도 항공뷰

포인트는 건설사가 아닌 서울시가 대체부지를 제안하고 나선 것이다. 

대체부지 확보 의무자체는 부지를 매입한 건설사 측이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서울시에서 국유지에 개발불가지역인 신구로유수지 생태공원을 먼저 대체부지로 제안했다는 사실이 의아하다. 

또한 본지 취재 결과 대한럭비협회 관계자는 "지난 10월에 서울시가 지구단위계획 변경안을 고시했는데, '대체부지를 반드시 마련해야한다'는 개발사업의 선행, 전제요건이 폐지되고 '대체부지 등은 세부개발 계획시 확정'한다는 내용이 담겼다"며 한숨을 쉬었다. 

또한 "온수역 일대 지구단위계획 결정안에 따르면 당초 대체부지 확보 전까지 도시계획시설 존치 및 개발을 유보하고 대체부지를 확보하겠다고 했는데 최근에 그 사안이 변경됐다"며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전했다.

한 마디로 대체부지 마련에 대한 관련 의무를 완화해준 셈이다. 이에 따르면 시에서 민간 건설사의 행정편의를 지나치게 봐주고 있다는 의혹을 피하기 어렵다.

럭비협회 측은 "온수 럭비구장 철거를 중단하자는 것이 아니라, 럭비인들이 활동할 수 있게 서울 어느곳에라도 합법적인 부지에 접근성이 좋은 온전한 대체시설을 지어달라는 것이다, 럭비인들이 목소리를 내는데도 소수라 들어주지 않으니 답답하다"라고 속 타는 입장을 전했다. 

지난 2012년, 서울 럭비구장에서 연세대와 고려대 선수들이 경합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럭비계에서는 문화체육관광부 소관의 사단법인 대한럭비협회의 입을 빌려 대체구장 마련 논의에 힘을 싣고자 한다. 향후 마련될 럭비구장이 전국 럭비인들이 모두 사용하는 '공익적 성격'이 강한 체육시설인만큼 해당 사안을 간과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해당 지대에는 주민 협약 하에 전문체육시설이 아닌 복합문화체육관은 들어설 수 있다. 그러나 지난 2019년 구로구청에서 열린 서울 럭비구장 개발사업 추진 협약식에는 온전히 '럭비구장' 이전이라는 사실이 명기되어있다. 

한 주민의 민원 제기 결과 구로구는 이에 대해 "특정 단체 시설이 아니고 구민 누구나 이용하는 생활체육시설이다"라고 답변한 바 있다. 

정황을 따져보면 서울시는 럭비협회와 주민들 모두에게 거짓말을 한 셈이 된다. 럭비협회에는 어떤 대책도 없이 이용이 불가능한 대체부지를 제시하고, 구로구 주민들에게는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생활체육시설'을 설치해주겠다고 약속한 셈이다. 

재밌는 사실은 이와 같은 환경에서 버틴 한국 럭비가 만일 국제대회에서 준수한 성적이 나올 경우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투혼을 발휘한 태극전사들' 등의 타이틀이 한국 럭비 선수단을 띄울지 모른다. 그러나 그 열악한 환경은 누가 만들었을까? 

열악한 환경에서 일어난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내기 전에, 선수들을 경기장 바깥으로 내몬 환경을 누가 조성했는지를 돌아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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