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입 실패한 재수생 투수, 전설의 반열 올랐다 – 잡초혼 우에하라 고지 이야기

백종인 2022. 12. 1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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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EN=백종인 객원기자] 그는 오사카 출신이다. 초등학교 시절 공을 잡았다. 아버지가 코치로 있는 팀이다. 재능은 별로였다. 후보도 안되는 레벨이다. 중학교 때는 육상부(3단뛰기)에 들어갔다. 야구부가 없는 학교였다. 대신 동네 클럽 팀에서 뛰었다.

고등학교는 야구부 있는 곳을 찾았다. 그나마 좀 하는 곳이 도카이대 부속 고교(교세이)였다. 육상부 출신이라 달리기는 인정받았다. 빠른 발 덕에 중견수를 맡았다. 물론 그래봐야 별 볼 일 없다. 고시엔 대회는 엄두도 못 내는 실력이다. 지역 예선 8강이 최고 성적이다.

3학년 때 투수를 겸했다. 에이스는 따로 있다. 다테야마 요시키(훗날 니혼햄 입단)다. 그의 역할은 패전처리(추격조)였다. 1년 동안 공식 기록은 6.1이닝이 전부다. 대신 배팅볼은 도맡았다. 1박스, 2박스. 녹초가 되도록 던졌다. 어깨 단련에 제법 도움이 됐다. 제구와 밸런스도 잡히는 느낌이다.

그럼 뭐 하나. 딱 거기까지다. 뽑아주는 곳이 없다. 드래프트는 꿈도 못 꾼다. 오라는 대학도 있을 리 만무하다. 별 수 없다. 체대에 지원서를 냈다. 야구는 틀렸으니, 체육교사라도…. 그런 심정이다. 체육관과 입시 학원을 몇 달간 오갔다. 죽자사자 매달렸지만, 결과는 뻔하다. 대입은 실패로 끝났다.

어쩔 수 없다. 재도전을 택했다. 예비학교(재수학원)에 등록했다. 어려운 가정형편에 손 벌릴 상황도 아니다. 생활비, 학원비는 스스로 벌어야 했다. 닥치는 대로 알바도 뛰었다. 험한 막노동도 가리지 않았다.

절치부심, 와신상담. 힘겨운 재수는 결실을 맺었다. 1년 뒤. 오사카 체대에 합격했다. 야구부는 있지만 지역리그 하위 팀이다. 그와 비슷한 여러 명이 모인 곳이다. 열정은 있지만, 미완의 재능들이다. 학교측의 지원도 충분할 리 없다. 각자 알바로 경비를 마련했다. 돈이 없어 대회조차 나가기 힘들었다.

당사자의 기억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연습게임을 신청해도 받아주는 팀이 없었다. 4학년이 되니까 조금씩 인정해 주더라. 그러던 어느 날 (명문) 메이지 대학과의 게임이 잡혔다. 그곳에 갔더니, 1학년생이 나와 우리에게 학교 구경을 시켜줬다. 대단한 규모에 주눅이 잔뜩 들었다.”

그러나 이 팀이 기적을 일으킨다. 각성한 에이스 덕분이다. 그는 일약 대학 리그 최고의 투수로 떠오른다. 4년간 성적이 36승 4패, 완봉이 13차례나 된다. 아직도 깨지지 않는 기록이다. 급기야 3학년 때, 일본 대표로 뽑혔다. 대륙간컵에 출전해 결승전 승리투수가 된다. 상대는 국제대회 151연승 중이던 쿠바였다. 프로 팀들의 관심이 시작됐다.

이후는 아시다시피다. ① 요미우리 자이언츠 입단 (역지명) ② 첫 해 20승, 신인왕 및 사와무라상 ③ 34세에 ML 진출 ④ 2013년 마무리 투수로 월드시리즈 우승(보스턴 레드삭스) ⑤ 요미우리로 복귀, 은퇴(44세).

일본에도 명예의 전당 비슷한 게 있다. ‘명구회(名球会)’다. 그야말로 전설들이 회원이다. 가입 조건은 통산 기록이다. 투수는 200승 또는 250세이브, 타자는 2000안타를 넘겨야 한다. 이제까지 63명에게만 허락됐다.

이곳이 신규 회원을 받아들였다(9일). 후지카와 규지와 우에하라 고지다. 둘 다 구원투수 출신이다. 가입 기준에는 부족하지만 특례를 적용했다. 분업화를 고려, 홀드를 감안했다. 우에하라는 미일 통산 134승 128세이브 104홀드를 인정받았다. 덕분에 전설의 반열에 오르게 됐다.

엘리트와는 한참 먼 커리어다. 실패와 좌절로 굴곡진 시간을 버텼다. 철저한 무명시절을 이겨냈다. 그래서 그의 정신을 잡초혼(雑草魂)이라고 부른다. 잡초 같이 질긴 생명력이라는 의미다.

그는 NPB 1팀, ML 4팀에서 뛰었다. 유니폼은 다르지만 한결 같은 등번호를 달았다. 19번이다.

“가장 힘들었던 기억이 19살 때였다. 재수하며 공사장을 전전하던 시절이다. 야간 작업이 두려웠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차들 사이에서 극한의 공포를 느꼈다. 그러나 가장 괴로운 것은 야구와 멀어진 일이다. 홈런이고, 안타고, 아무리 맞더라도 (야구를 할 수 있는) 프로는 괴롭지 않다. 그걸 절실히 깨달았다. 19번은 그 시간을 잊지 않으려는 뜻이다.”

칼럼니스트 일간스포츠 前 야구팀장 / goorada@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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