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120㎝의 문… 여기서는 王도 고개를 숙여야 한다

베들레헴·나사렛(이스라엘)/김한수 종교전문기자 2022. 12. 12.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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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특집 이스라엘 성지 순례(上) 탄생 : 베들레헴~나사렛
지난 3일 베들레헴 예수탄생교회 앞 광장에서 대형 성탄 트리 점등식이 열렸다. 베들레헴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있지만 전 세계의 순례객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이강근 유대학연구소장 제공

이곳에 들어가기 위해선 누구라도 허리를 숙여야 했다. 지난달 28일 찾은 이스라엘 베들레헴의 예수탄생교회. 이 교회 출입구는 높이가 1m20㎝에 불과했다. 비잔틴 시대에 최초 건축된 문은 높았는데 십자군 시대엔 아치 형태로, 500년 전 오스만투르크 시대엔 현재의 높이로 점점 낮아졌다고 한다. 가장 낮은 모습으로 세상에 온 예수 탄생 현장을 만나기 위해선 세상 권세가 아무리 높아도 허리를 숙이고 낮아져야만 한다는 무언의 건축적 메시지로 읽혔다.

베들레헴 예수탄생교회 출입문은 높이가 1.2m에 불과해 허리를 숙이지 않고는 지날 수 없다. /김한수 기자

교회 지하엔 예수가 태어난 말구유 자리가 있었다. 예수 탄생 당시엔 마굿간이었지만 그 위에 교회를 지어 마굿간 자리는 지하가 됐다. 예수가 태어난 곳 바닥에는 별이 새겨져 있었다. 이곳엔 성인 무릎 높이로 휘장이 둘러있어서 허리를 굽히는 정도가 아니라 엎드리다시피 무릎을 꿇지 않으면 별을 볼 수 없었다. 순례객들은 줄지어 침묵 속에 기다리다 자신의 차례가 되면 별 앞에 엎드려 입을 맞추고 이마를 대고 기도를 올렸다. 십자성호를 왼쪽부터 긋는 가톨릭, 오른쪽부터 긋는 정교회, 십자성호를 긋지 않는 개신교 신자 등 교파는 다양했다. 그러나 기도를 마친 후에도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모습에선 똑같은 감격과 간절함이 느껴졌다.

베들레헴 예수탄생교회에서는 예수가 태어난 말구유가 있던 자리로 전해지는 곳에 별을 새겨놓았다. 한 순례객이 별 앞에 무릎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다. /김한수 기자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의 서남쪽과 맞닿아 있었다. 예루살렘 구도심에서 베들레헴 예수탄생교회까지 직선거리로는 10㎞ 남짓이다. 헤롯왕 군대가 한달음에 달려와 예수를 찾아낼 수 있을 거리였다. 예수 가족이 이집트로 피란 떠날 때 얼마나 다급했을지가 느껴졌다. 베들레헴은 현재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에 속해 있다. 거주자는 대부분 아랍인.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이 한창이던 예수탄생교회 광장 맞은편엔 이슬람 사원(모스크)이 있었다. 광장 주변에 ‘평화 센터’ 등 유독 ‘Peace’라는 단어가 적힌 간판이 많았다.

성 제롬이 신약과 구약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것으로 전해지는 동굴. /김한수 기자

예수탄생교회는 1600년 전 ‘성경의 세계화’ 현장이기도 했다. 4세기 말 성 제롬(히에로니무스)이 구약과 신약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했던 동굴이 지하에 있었다. 제롬은 흔히 성화(聖畵)에서 해골·사자와 함께 등장하는 인물. 가톨릭의 4대 교부(敎父)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베들레헴으로 찾아온 그는 그때까지 유대인(히브리어)과 그리스인(헬라어)의 언어로 기록됐던 성경을 로마제국의 언어인 라틴어로 번역했다. 제롬의 번역 덕분에 기독교는 라틴어라는 ‘고속도로’를 타고 로마제국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할 수 있었다.

천사가 목자들에게 예수 탄생을 알린 언덕에 세워진 교회 앞에서 소강석 새에덴교회 목사가 설명하고 있다. 소 목사 뒤로는 예수 시대처럼 광야가 펼쳐져 있다. /김한수 기자

예수탄생교회가 현대적 도심에 위치해 붐볐다면, 베들레헴 외곽 ‘목자들의 들판 교회’에서는 예수 탄생 당시의 풍경을 느낄 수 있었다. 교회가 세워진 한적한 언덕엔 자연 동굴이 있었고, 언덕 아래엔 지금도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저 들 밖에, 한밤중에, 양 틈에 자던 목자들, 한 천사가 전하여준, 주 나신 소식 들었네”라는 크리스마스 캐럴 ‘노엘’의 가사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나사렛에는 어린 시절 예수 가족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10평 정도의 동굴 '요셉의 집'이 있다. 동굴과 요셉의집교회를 관리하는 프란치스코회 사제가 설명하고 있다. /김한수 기자

예수가 어린 시절을 보낸 나사렛은 이스라엘 북부 갈릴리 호수에 가까운 곳. 나사렛 역시 현재 무슬림이 더 많이 거주하는 도시였다. 이곳에도 대로 한가운데에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가 장식돼 성탄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요셉의집교회’ 지하엔 요셉과 마리아, 예수가 살았다고 전해지는 지하동굴 ‘요셉의 집’이 있었다. 예수 당시에도 부자들은 석조 건물을 짓고 살았지만 성가족은 보통 사람들처럼 동굴에서 살았다고 전해진다. ‘요셉의 집’ 바로 곁에는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 잉태를 알린 ‘수태고지(受胎告知) 교회’가 있다. 수태고지교회는 웅장했다. 규모도 크고 주변에 한국을 비롯한 세계 60여 국에서 온 성모자상(聖母子像) 성화가 외벽을 가득 메우고 있어 소박한 지하 동굴 ‘요셉의 집’과 대조를 이뤘다.

나사렛 수태고지교회에는 세계 60여 국에서 보내온 성모자상 그림이 전시돼 있다. /김한수 기자

순례는 묵상을 통해 역사와 대화하는 여행길이다. 로마제국과 비잔틴제국은 4세기에 기독교를 공인하고 국교로 정한 이후 예수와 관련한 유적에 기념 교회를 세웠다. 현재 이스라엘 순례 코스는 이 유적들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2000년 시공의 간극을 메워주는 것은 상상력과 신앙이다. 순례객들은 현장에서 온몸의 감각을 통해 예수 당시의 모습을 느껴보려고 애썼다. 베들레헴 예수탄생교회 옆 캐서린교회 출입문에 붙은 안내문은 그런 정신을 담고 있다. “당신이 여행객으로 여기 들어왔더라도 나갈 때는 순례자가 될 것입니다. 당신이 순례자로 이곳에 들어왔다면 나갈 때는 더욱 거룩한 이가 될 것입니다.”

순례에 동행한 새에덴교회 소강석 담임목사는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 어린 시절 살았던 곳이 이렇게 낮은 곳이었다는 것을 보면서 한국 교회는 더욱 낮아지고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베들레헴·나사렛(이스라엘)=김한수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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