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 접수와 표 사는 곳 [삶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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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또 한 해를 넘길 것 같다.
은 자영업자들이 '소장 접수' 기자회견을 한 뒤 법원에 소장을 접수했다는 것인데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하다.
그렇다면 '원고들이 소장을 접수했다' 같은 어색한 표현이 계속 통용되는 것에는 법원을 비롯한 공공기관들이 당사자들의 처지에 대해 역지사지가 부족한 데에도 일말의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닐까? 사소한 말 한마디 가지고 지나치게 거창한 이야기를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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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또 한 해를 넘길 것 같다. 끝날 듯하면서 여전히 불씨가 사그라지지 않는 형국이다. 팬데믹 상황에서 여러 문제가 불거졌지만, 경제 문제로는 행정당국이 방역을 위해 취했던 영업 제한 조치 때문에 피해를 본 자영업자들의 처지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자영업자 2,000여 명이 국가를 상대로 손실보상을 청구하는 소송은 이미 올해 3월에 시작해 현재도 진행 중이다. 관련 기사를 검색하다 자영업자들이 법원에 소송을 낸 올해 3월 4일 기사를 찬찬히 읽어 보았는데 '접수'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기사 내용은 자영업자들이 '소장 접수' 기자회견을 한 뒤 법원에 소장을 접수했다는 것인데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하다. 접수(接受)란 받아들인다는 뜻인데 법원이라면 몰라도 소송의 원고인 자영업자들이 소장을 접수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 경우에는 '제출'이 적합한 표현이다. 그런데 왜 원고들은 자신들이 법원에 소장을 내는 행위를 소장 접수라고 표현하고, 언론도 원고들이 법원에 소장을 접수했다는 식으로 쓰는 걸까?
원고들이 소장을 제출하러 들어갔을 법원 민원실의 풍경이 실마리 하나를 제공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장을 제출하는 법원 창구는 제출 창구가 아니라 접수창구(얼마나 이 말이 널리 쓰이는지 한 단어로 보아 붙여 쓴다)로 불리며 창구 위쪽에는 소장 접수라고 적혀 있기 일쑤지 소장 제출이라고는 적혀 있지 않다. 들어가서 두리번거리고 있으면 안내하는 분이 "뭐 접수하러 오셨어요?" 하고 물을 공산이 높고, 여기에 대해 자연스럽게 "소장 접수하러 왔어요"라고 답할 가능성이 크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이런 일이 법원에서만 일어나는 것 같지는 않다. 검찰청이나 경찰서에 고소인이 고소장을 내는 것도 고소장 접수라고 하고, 행정기관에 민원인이 진정서 같은 민원서류를 내는 것도 접수했다고 한다. 꼭 관공서라고 해서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종합병원에서도 흔히 진료받는 환자에게 수납 창구에 가서 진료비를 '수납'하라고 한다. 수납(受納)은 받아서 넣는다는 뜻인데 말이다.
이러한 일들과 대비되는 한 장면을 떠올리면 그 이유는 더 분명해진다. 예전에는 기차역이나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차표를 사는(또는 파는) 곳을 '매표소'라고 적었는데 언제부터인가 '표 파는 곳'이라고 쓰다가 다시 '표 사는 곳'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대부분 표 사는 곳으로 표기하고 있다. 표 파는 곳이란 역이나 터미널의 관점에서 나온 말이고 표 사는 곳은 승객의 관점이 반영된 말이다. 그런데 매표소가 결국 표 사는 곳으로 귀결된 것은 역이나 터미널 측에서 어떤 이유에서든 자신의 관점이 아니라 승객의 관점을 우선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원고들이 소장을 접수했다' 같은 어색한 표현이 계속 통용되는 것에는 법원을 비롯한 공공기관들이 당사자들의 처지에 대해 역지사지가 부족한 데에도 일말의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닐까? 사소한 말 한마디 가지고 지나치게 거창한 이야기를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대중이 사용하는 일상언어 가운데에는 공식용어가 포착하지 못하는 현실사회의 실상과 미묘한 권력 관계를 언뜻 드러내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역지사지가 어려운 것은 대부분 자신이 역지사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조차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상대적 강자라면 더더욱.
우재욱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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