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정 때 벌어진 ‘제주 4·3사건’ 미국 책임…희생자 추모 등 나서야”

김유진 기자 2022. 12. 11. 21:4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워싱턴서 공론화 학술대회…역할 인식 확대 등 의견 모아
“바이든이 평화공원 방문한다면 역사적 상처 치유하는 길”
지난 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윌슨센터에서 열린 제주4·3 관련 심포지엄에서 존 메릴 전 국무부 정보조사국 동북아실장(왼쪽에서 두번째), 찰스 크라우스 윌슨센터 부국장(세번째) 등이 토론을 하고 있다.

“제주4·3사건의 진실은 50년 동안 억압됐지만 역사 화해, 피해 보상이 이뤄지면서 새로운 내러티브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과제 하나는 미국 정부가 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문정인 세종연구소 이사장)

제주4·3사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공론화하는 학술행사가 지난 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됐다. 미 싱크탱크 윌슨센터가 주최하고 제주특별자치도, 제주4·3평화재단, 월든코리아가 공동 주관한 심포지엄 ‘제주4·3과 인권, 그리고 한·미 동맹’이다.

미군정기인 1948년 4월3일 무장봉기로 촉발된 제주4·3사건은 토벌대의 ‘초토화작전’ 등 강경 진압으로 제주도민 약 10분의 1에 달하는 2만5000~3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많은 인명피해를 기록한 사건이다.

이날 심포지엄은 이례적인 논의의 장이었다. ‘4·3과 미국’은 미국의 대다수 한반도 전문가들이나 직접 한·미관계를 다루는 미 정부 당국자들에게 여전히 생소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심포지엄에 참가한 한·미 전문가들은 제주4·3에 관한 미국의 역할에 대한 인식을 널리 확산하고, 인권적 관점에서 미국 정부가 희생자 추모 등 성의 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발표자로 나선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 대사는 미국이 4·3사건의 역사적 사실을 “고통스럽지만 직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미국이 스스로 내세우는 인권 등 이상을 실현한 적이 드물지만 미국은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이기 때문에 과거를 돌아볼 기회가 있다”고 했다.

그는 1996년 4월 제주에서 열린 김영삼 대통령과 빌 클린턴 대통령의 정상회담에서 4·3사건이 논의되지 않은 것에 대해선 “어떤 면에선 기회를 놓친 것”이라면서도 “당시 한국 내에서도 화해 문제가 거론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시대의 반영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양조훈 제주4·3중앙위원은 미군정이 남한 단독선거 실시에 대한 제주도민의 반대를 무마하기 위해 재선거 실시·체포작전 등에 가담했고, 미 비밀문서에서 초토화작전을 칭찬하는 내용이 발견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양 위원은 “우리의 활동이 거대한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럼에도 계란 던지기를 시작해야 한다. 미국 언론, 시민단체, 양식 있는 학자 등 미국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정부가 4·3사건에 대해 당장 ‘사과’는 아니더라도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와 연대 메시지를 낼 것을 제언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성윤 미 터프츠대 교수는 2016년 5월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이 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이 원자폭탄을 투하한 히로시마를 방문했던 사례를 들어, 조 바이든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이 제주4·3평화공원을 함께 방문한다면 “미국이 동맹국의 인권을 소중히 여기고 어두운 역사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 이사장도 “먼저 미 대사관 관계자들이 추모하고 추후에 한국과 미국의 대통령이 제주도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평화공원을 방문한다면 역사적 상처를 치유하는 길이 되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

1975년 국내외 학계에서 처음으로 제주4·3사건에 대한 논문을 쓴 존 메릴 전 국무부 정보조사국 동북아실장은 4·3의 국제적·현재적 성격을 강조했다.

메릴 전 실장은 “제주4·3은 2차 세계대전 종전, 식민주의 종언과 함께 동아시아에서 확산된 대중봉기의 한 사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보다 넓은 관점에서 4·3을 연구하고 대만이나 동남아시아 여타 국가에서 일어난 양민학살의 희생자들과 연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또 “미군정이 초기에는 자치를 보장했지만 냉전 현실이 닥치면서 통제를 강화하게 됐다”며 서북청년단과 미군정의 긴밀한 관계 등을 4·3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말해주는 사례로 들었다.

메릴 전 실장은 해군기지 건설 이후 “군사화된” 제주가 동북아 군비경쟁의 또 다른 희생양이 될 수 있다며 “오늘의 제주에서도 잠재적 폭력의 씨앗이 도사리고 있다. 4·3 등 역사적 사건 해결만이 아니라 한국 문제에 미국이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글·사진 워싱턴 | 김유진 특파원 yjkim@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