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미국이 ‘제주 4·3’ 책임 인정하고 사과해야 한다”
‘제주4·3과 인권, 그리고 한미동맹’ 주제
고희범 재단 이사장 “유족둘 고통 여전”
“미국은 이제 4·3의 진실과 마주할 때이며, 이것이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건전하고 굳건하게 만들 것입니다.”
제주 4·3사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고 사과를 통한 과거사 극복을 요구하는 심포지엄이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 열렸다. 제주4·3평화재단, 제주특별자치도, 미국 싱크탱크 윌슨센터가 8일(현지시각) 함께 개최한 ‘제주 4·3과 인권, 그리고 한미동맹’ 심포지엄에서 한·미 참석자들은 4·3에 대한 미국의 관여와 책임을 부인할 수 없다며 “한국 정부의 진상 조사와 사과, 보상, 재심을 통한 무죄 판결이 이뤄진 상황이니 이제는 미국이 나설 차례”라는 목소리를 쏟아냈다.
고희범 4·3재단 이사장은 이날 개회사에서 “4·3은 74년 전 미군정 관할 아래에서, 정부 수립 후에는 미 군사고문단의 통제 아래에서 진행됐다”며 3만명이 목숨을 잃고 유족 14만명이 오늘날까지 큰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제주도민들과 유족들은 4·3과 직접 관계가 있는 미국은 어떤 자세를 갖고 있는지 묻고 있다”며 미국이 4·3의 진실과 마주한다면 한-미 관계가 더 굳건하게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이뤄진 진상조사 결과를 보면, 4·3의 비극적 전개 과정에서 미국이 직간접으로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입증돼 있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 미군정은 남한에 대한 정치·군사적 통제력을 완전히 쥐고 무력 진압을 이끌었고, 이후에는 주한미임시군사고문단장인 윌리엄 로버츠 장군 등이 ‘1948년 11월 토벌’ 등 초토화 작전을 격려하며 한국 군경의 등을 떠밀었다.
허호준 박사 “미군정 개입 증거 명확”
존 메릴 전 동북아국장 “묻혀진 역사”
스티븐스 전 대사 “미 대통령 제주 방문을”
문정인 교수 “미국 전향적 태도 필요”
이성윤 미국 터프츠대 교수는 토론 세션에서 “한-미 동맹은 민주주의 체제, 평화, 자유, 정의라는 가치와 신념의 공유에 기반한 진정으로 특별한 동맹”이라며 “그러나 74년 전 미국은 민주주의, 인권, 평화, 정의에 배치되는 사건(4·3)을 감독했다”고 지적했다. 4·3의 기본 배경과 미국의 책임에 관해 양조훈 전 4·3재단 이사장은 “비극의 뿌리는 미국과 소련이 그어놓은 38선이며, 희생자들은 이 선을 걷어내려고 5·10 단독선거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고 말했다.
‘4·3’ 주제 첫 정치학 박사이자 <4·3, 미국에 묻다>룰 펴낸 허호준 <한겨레> 선임기자 역시 4·3 초기부터 미군정이 제주도 주둔 미군 지휘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제주도의 파괴 분자들을 제거하고 법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한국 경비대를 귀관 임의대로 사용하라”고 지시하는 등 많은 증거가 미국의 책임을 가리키고 있다고 했다. 그는 양민에 대한 대량학살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이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쥔 상태에서 “적극적인 작전”을 독려하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참석자들은 2차대전 후 냉전이 시작되는 국면에 여러 국가에서 발생한 대량학살 사건들 가운데 그 참혹함을 생각한다면 4·3이 ‘가장 주목받지 못하고 잊혀진 사건’이라는 데 동의했다. 미국이 책임을 부인하는 가운데 한국 정부가 국가보안법과 연좌제로 피해자들과 유족들을 철저히 짓눌렀기 때문이다. 존 메릴 전 미 국무부 정보조사국 동북아국장은 “4·3은 묻혀진 역사다. (미국으로서는) 너무 당혹스러운 사건이기 때문에 누구도 그것에 대해 기록하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했다. 4·3 때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형제 2명이 희생당한 양수연 재미4·3기념사업·유족회 대표 역시 “1980년대에만 해도 희생자 가족들이 연좌제로 고통을 겪었다”며 자신의 아픈 가족사를 소개했다.
이날 토론의 결론은 미국이 이제 그만 사실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과 인연이 깊은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는 1970년대 제주도를 찾았을 때는 4·3에 대한 얘기를 듣지 못했다면서 “우리는 이제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고 했다. 이성윤 교수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2016년 5월 미국내 일부의 반발 가능성을 무릅쓰고 아베 신조 총리와 함께 피폭지인 일본 히로시마를 방문한 사례를 들면서 “미국 의원이나 부통령, 그리고 언젠가 대통령이 4·3평화공원을 방문한다면 역사는 그것을 도덕적 행위로 판단할 것”이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스티븐스 전 대사도 1996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제주도를 방문했을 때 기회를 만들 수 있었는데 아쉽다고 했다. 양조훈 전 이사장은 “4·3은 세계에서 과거사 문제 해결의 모범이 되고 있다”며 “남은 것은 미국의 사과”라고 했다.
4·3과 한-미 동맹의 미래를 함께 논의한 라운드테이블에서 제주도 출신이기도 한 문정인 세종연구소 이사장은 1948~49년 제주도에서 일어난 일은 “미국이 때때로 그 이상에 맞게 행동하지 못한” 사례들 중 하나라며 미국의 전향적 태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워싱턴/ 이본영 특파원 ebon@hani.co.kr, 사진 제주4·3평화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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