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데스크] 영구채에 영구가 없다

황형규 기자(hwang21@mk.co.kr) 2022. 12. 11.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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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환 의무 없는 영구채
5년 후 상환 안 했다고
한국 채권 신뢰 흔들
'자본' 대접 받고 있지만
실제론 부채 아닌가

해외에서 발행한 '신종자본증권' 하나가 채권 시장을 발칵 뒤집어놨다. 발행 5년 후 '상환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금리는 치솟고 가격은 폭락했다. 충격은 시장 전체를 덮쳤다. 외국 투자자들은 한국 채권을 믿지 못하겠다며 투매에 나섰다. 불똥은 해외 자금 조달에 나선 한국 기업 모두에 튀었다. 돈 구할 길이 막혔다. 시장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금융당국까지 나섰다. 결국 '상환하겠다'고 결정을 번복한 후에야 시장은 진정됐다.

얼마 전 흥국생명 신종자본증권 사태의 전말이다. 스토리는 단순하다. 하지만 꼼꼼히 짚어보면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신종자본증권의 또 다른 이름은 '영구채'다. 만기가 영구(永久)라는 뜻이다. 빚(부채)은 갚아야 할 기한이 있고, 의무가 있다. 내 돈(자본)은 갚아야 할 의무가 없다. 만기가 영구라는 건 상환 의무가 없다는 말과 같다. 부채보다는 자본에 가깝다. 영구채가 국제회계기준(IFRS)에 '자본'으로 인정받는 이유다.

그런데 영구채 발행 5년 후 콜옵션(상환 선택권)을 행사하지 않았다고 난리가 났다. 자본(영구채)을 갚지 않았다고 시장이 멈췄다? 상식의 입장에서 보면 어리둥절하다. 영구와 만기 5년. 그 사이엔 무한대의 괴리가 존재한다. 왜 이렇게 됐을까. 엄격한 조건 아래 은행권만 발행하던 영구채는 2012년 상법 개정으로 일반 기업에 허용됐다. 하지만 첫 타자로 나선 두산인프라코어 영구채부터 논란이 불거졌다. 30년 만기, 콜옵션, 풋옵션 등 발행조건을 놓고 자본이냐, 부채냐 거센 논쟁이 벌어졌다. 금융당국, 회계전문기관까지 격론을 벌이는 진통 끝에 발행이 이뤄졌다.

이후 10년 동안 영구채는 봇물이 터졌다. 비행기 리스로 부채가 많은 항공사들이 특히 애용했다. 자금도 조달하고, 부채비율(부채/자본)도 낮추는 일석이조였다. 영구채가 자본 대접을 받는 덕분이다.

문제는 영구채 발행 이후 특정시점(예: 5년)에 콜옵션을 행사하는 것이 관행처럼 자리 잡았다는 점이다. 투자자들도 5년 후면 '당연히' 상환될 것이라고 여기고 사들였다. 이 때문에 일부 영구채는 사실상 "고금리 채권"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금리가 낮아 금융시장이 평온할 땐 별문제가 없었다. 회사는 또 다른 영구채를 발행해 기존 영구채를 상환하면 됐다.

이례적인 금리 폭등에 자금 시장이 위기에 직면하자 영구 없는 영구채의 모순이 수면 위에 드러났다.

대부분 영구채엔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으면 금리를 추가로 얹어주는 스텝업 조항이 있다. 시장 금리가 낮을 땐 새로운 영구채를 발행해 기존 영구채를 상환하는 것이 낫지만 반대의 경우엔 스텝업을 선택하는 것이 유리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시장은 이런 선택조차 받아들이지 않았다. '5년 후 상환'이 의무로 굳어진 것이다. 심지어 금융의 최우선 가치인 '신뢰'를 저버린 행동이라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불이행 금액이 2050억원에 불과한 레고랜드 사태가 수백조 원의 채권 시장을 마비시킨 건 국가나 다름없는 지방자치단체가 '신뢰'를 내던졌기 때문이다.

신뢰를 지키려 회사가 보유한 현금으로 영구채를 상환하려 해도 또 다른 딜레마에 직면한다. 영구채를 갚으면 부채가 아닌 자본이 줄어드는 결과를 낳는다. 자본이 쪼그라들면 부채비율이 높아진다. 순식간에 기업이 부실해 보인다. 금융회사는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건전성 지표가 악화된다.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회계 전문가들은 회계가 중요한 이유는 '조기 경보' 기능 때문이라고 한다. 재무제표에 담긴 실질적인 숫자를 읽어 투자자, 국가는 다가올 기업, 산업의 위험을 감지한다. 흥국생명 사태는 영구채가 과연 실질 우선의 원칙에 부합하고, 조기 경보 기능에 충실한지 되묻고 있다.

[황형규 증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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