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회사원] "촉이 오면 후광이 보여요"… 제2의 정국과 제니 찾아 어디든 간다

정주원 기자(jnwn@mk.co.kr) 2022. 12. 11.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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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기획사 캐스팅 디렉터의 애환

◆ 어쩌다 회사원 ◆

한 연예기획사 연습생들이 연습실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다. 작은 사진은 세계적 K팝 그룹 블랙핑크. 왼쪽부터 지수, 제니, 로제, 리사. 【사진 제공=YG엔터테인먼트】

'어디서 이런 보석 같은 친구를 찾았을까.' 신인 K팝 가수 데뷔 후 캐스팅 디렉터가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다. 방송 공개 오디션을 통해 데뷔 전부터 인기를 끌거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스스로 인플루언서가 되는 이도 많아졌지만, 아이돌 기획사 캐스팅 디렉터는 여전히 숨은 진주를 찾아내기 위해 발품을 판다.

K팝 산업의 규모도, 영역도 넓어진 지금 이들은 어떻게 일하고 있을까. 방탄소년단(BTS) 소속사 하이브의 산하 레이블인 빅히트뮤직·빌리프랩·케이오지(KOZ)엔터테인먼트와 국내 전통의 3대 기획사 SM·YG·JYP엔터테인먼트 중 2곳에서 근무하는 3~12년 차 캐스팅 디렉터들을 만났다.

원석을 찾는 방식의 본질은 2000년대 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았다. 10대 청소년이 모이는 행사, 학교, 학원 등을 다니며 눈에 띄는 얼굴을 찾는 '길거리 캐스팅', 회사 이름을 내건 공개 행사를 열어 재능 있는 꿈나무를 발탁하는 '공개 오디션' 등이다. 여전히 예술고등학교 실기 시험 날 교문 앞은 각종 기획사 사람들로 붐비고, 이름난 예비 스타 앞에는 명함을 전달하려는 긴 줄이 늘어선다.

다만 전보다 과정은 훨씬 조직화됐다. SM이 13세 보아를 발탁해 2년여의 연습 기간을 거쳐 2000년에 데뷔시켰을 때 직원 수는 10여 명에 불과했지만, 2022년 지금은 500여 명 규모의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그사이 SM의 노하우는 K팝 산업 곳곳에 퍼졌다.

최근 아이돌 캐스팅은 비대면화·글로벌화하는 추세다. 무엇보다 온라인·SNS 캐스팅을 빼놓을 수 없게 됐다. 코로나19가 유행한 지난 3년간 가속화한 변화다. 모두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대형 행사는 줄줄이 취소되니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10년 차 A씨는 이미 변화에 적응했다. "요즘 친구들은 자기를 어필하는 법을 잘 알아요. 자기 외모나 춤·노래 영상을 직접 올리니 이를 모니터링하는 게 일이에요. 10대 사이에서 유행하는 해시태그를 쳐보기도 하고요."

유학생·동포 출신이나 외국인 인재 발굴도 활발하다. 데뷔 후 글로벌 진출을 노리려면 언어 장벽을 넘어야 하기 때문. 12년 차 B씨는 올해 여름부터 6개월간 무려 17개국을 방문했다. 그만큼 신입 캐스팅 디렉터에게도 외국어 능력은 필수 요소가 되고 있다. "국내는 좁고 보는 눈도 비슷하잖아요. 지난 주말 이른 아침에 한 친구가 오디션을 봤는데, 얼굴에 부기가 하나도 없기에 물었더니 '사실 다른 소속사 오디션을 보고 바로 왔다'고 하더라고요. 회사 간 인재 영입 경쟁이 치열해지니 해외에서 숨은 보석을 찾아야죠."

캐스팅 디렉터는 주로 10대 청소년 혹은 그들의 부모와 소통한다. 10대와 학부모 세대의 최신 관심사를 파악하는 건 중요한 무기가 되곤 한다. 10년 차 C씨는 "소위 '인싸'라고 불리는 10대 성향을 파악해 이들이 자주 가는 지역, 장소를 다닌다"고 했다.

예전 방식대로 '오디션을 열 테니 지망생은 오라'고 두 팔만 벌리고 있어서는 파리 날리기 십상이다. 고된 경쟁, 불확실한 미래를 견뎌내야 하는 연습생에 굳이 자원하는 청소년은 줄었다. 긴 오디션 단계를 못 견디고 금세 떠나버리기도 한다. A씨는 "예전엔 글로벌 공개 오디션이 연례행사였다면, 이제는 2주 만에 접수하는 등 최대한 짧게, 자주 연다. 오디션이 너무 거창한 것 같아 '사진 태그 이벤트'로 간소화하는 시도도 해봤다"고 전했다. 올해 SM은 종로학원 등과 합작해 춤, 노래, 연기를 경험해 볼 수 있도록 중·고등학생에게 무료 방과 후 교육 프로그램도 지원했다.

연습생 연령대가 점점 어려지면서 어린아이들의 교육 발달과 심리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아이와 부모가 고민하는 경우 분기에 한 번씩 성장 과정과 근황을 확인하는 것도 캐스팅 업무의 한 부분이다. B씨는 "예전엔 초등학생 연습생이 이례적이었지만 요즘은 11세 수준으로 낮아지고 있다"며 "캐스팅 디렉터로서 외국어나 실용음악·댄스 경력 외에 '청소년 교육' 전공·경력도 중요한 자질이 되고 있다"고 했다.

자신이 점찍은 '원석'이 소속사와 계약하게끔 설득하는 일도 중요하다. 자주 보면서 물심양면으로 신뢰를 얻어야 한다. 나이가 어릴지라도 캐스팅 대상을 존중해야 한다는 인식은 업계의 불문율이다. 3년 차 D씨는 "유망한 청소년들의 장래를 결정할 수 있는 일이란 점에서 책임감을 느끼면서 진지하게 임하려고 한다"고 강조했다. 캐스팅 디렉터 E씨도 "아이돌을 꿈꾸는 10대 학생들의 경우 대개 여리고 감성적인 면이 있어서 대화할 때 단어 선택이나 어투에 신경을 쓰며 조심스럽게 소통한다"고 했다.

다만 설득 과정에서 '몇 개월 안에 데뷔를 보장해주겠다'는 식의 현혹은 캐스팅 디렉터도, 지망생과 학부모들도 지양해야 한다. A씨는 "어떤 회사와 계약하고 연습생 생활을 할지는 개인 선택의 영역이라 강요할 수 없다. 우리는 제안을 할 뿐 선을 넘진 않는다"고 단언했다.

방탄소년단(BTS) 멤버 정국이 카타르월드컵 개막식에서 공식 주제가를 부르고 있다. 【매경DB】

B씨는 "트레이닝은 회사 입장에선 투자고, 연습생 입장에선 자신의 진정성과 실력을 키우는 기회"라며 "어떤 회사가 데뷔 시점을 정해두고 팀을 꾸린다면 투자 여력이 없기 때문일 위험이 있다. 그런 경우 데뷔하더라도 후속 활동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이어 "캐스팅 담당자로서 후보생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최선을 다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다' '데뷔 여부를 떠나 1~2년 투자하면 배울 수 있는 것도 많다'는 정도"라고 했다.

'몇 명을 발굴해 연습생으로 발탁했는가.' 성과가 여실히 드러나는 직무다 보니 '워라밸'은 꿈도 못 꾼다. A씨는 이 단어를 듣자마자 실소를 터트렸다. "사람 모이는 곳에 가야 하니 남들 쉴 때 못 쉬고, 갑자기 일정이 잡힐 때도 많죠. 해외 출장이라도 가면 큰돈 들여 나왔다는 중압감 때문에 한 명이라도 더 찾으려고 돌아다녀요. 호텔 방에서도 계속해서 그 지역 SNS를 뒤질 수밖에 없지요. 자기 시간이나 월급을 따지며 할 일은 아니에요."

D씨는 "보통 내근 20%, 외근 80% 비율로 일하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노하우도 현장에서 각자 쌓아간다. B씨는 "수학여행 기간엔 서울의 놀이공원에 여러 지역 학생이 몰리고, 매년 2월이나 6월엔 인천공항에 가면 출·귀국하는 10대 유학생을 많이 볼 수 있다"고 귀띔했다. "아무리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한다지만, 직접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죠. 진짜 보석을 발견하면 후광이 보이거든요. 그 희열은 잊히지 않아요."

이직은 잦은 편이다. 경력을 살려 캐스팅 외에 기획 제작·매니지먼트·마케팅 등으로 업무 영역을 넓혀가는 경우도 많다. 비유하자면 원석을 캐내는 데까지가 캐스팅팀 몫이고, 자신이 캐낸 원석을 가다듬고, 포장하고, 가치를 올리고, 관리하는 일까지 관심을 갖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캐스팅을 위해선 물불 안 가리고 자기 능력을 시험해 본다는 점, K팝 산업 선봉에 서서 보는 눈을 키울 수 있다는 점은 이 일이 가진 분명한 매력이다. B씨는 "대중에게 직관적으로 와닿는 엔터사 가치는 상장 여부, 시가총액 같은 정량적인 평가보다 '올해 어떤 신인팀을 내보냈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 A씨는 이렇게 말했다. "혹자는 '그룹 머릿수를 정해놓고 채워 넣는 거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업계의 일원으로선 가당치 않은 얘기예요. 좋은 신인이 계속해서 나와야 우리 회사도, K팝 산업도 굴러간다고 생각해요. 원석이 없으면 제작 자체가 불가능하니까요."

[정주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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